쉬엄쉬엄 여행의 추억/국내여행·마실

[2006년 7월] 청송 주왕산기행 (대전사---주왕암/주왕굴---1폭포)

인생멘토장인규 2006. 8. 4. 14:50

[대전사와 기암]

고려 태조2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을 위해 세운 절이라는 설과 신라 문무왕12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는데 보광전 앞뜰에 세운 두개의 석탑에 새겨진 조각이나 주변에서 발굴된 불상과 유물의 연대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본래는 매우 큰 절로서 많은 승려가 있었다는데 역사가 오랜 절이어서 여러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은 보광전과 명부전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여기저기 들어나 있는 주춧돌들이 그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다.

[주왕암]

대전사 동쪽 비탈진 계곡을 올라가면 안절이라는
별칭이 있는 주왕암이 있는데 이 암자는 대전사와
함께 창건되었다 하며 주왕의 혼을 위안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문간채인 가학루는 중충 누각으로 되어 있고 기와는 이끼가 그윽히 끼어 오랜 풍상을 보여주며 16나한을 모신 법당 나한전이 있다

[주왕굴]

주왕암 뒤안길 오른편에 협곡이 있다.

파란 하늘이 아득히 내다 보이는 좁은 바위틈 길을 따라 30m쯤 들어가면 거대한 암벽에 부딪치게 된다.
약 50여m 되는 절벽 하단에 세로 5m, 가로 2m 정도의 동굴이 있는데 주왕이 마장군에게 쫓겨서 숨어 살았던 동굴 이다. 깊이 2m 정도의 굴속 구석진 곳에는 탱화(부처님의 불상 그림)가 안치되어있고, 굴에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가파른 암벽이어서 쇠다리를 잡아야 올라갈 수 있는데, 절벽 정상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의 포말로 인하여 오색 찬란한 무지개가 꿈처럼 서린다.
주왕이 천연의 요새인 이 곳에서 대망의 꿈을 저 버리지 않고 재기를 다짐하다가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무장굴] 주왕암 약200m 못미쳐 오른편 산록에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장굴(武藏窟)이다. 이 굴은 주왕의 군사들이 무기를 은닉했던 곳이었다고 전해 오는데, 굴속으로 6m쯤 들어가면 암석이 가로막고 있고 그 구멍이 어린애도 빠져 들어갈 수 없이 적어서 더이상 안으로 전진할 수가 없다. 더욱이 성냥불을 커면 금새 꺼져 버릴 정도로 산소가 적어서 호흡도 곤란해진다. 가을철 무장굴 앞에서 주왕암쯤 산경을 바라보면 칭칭이 어우러진 단풍이 일품이다. 무장굴 뒷쪽에 솟아있는 봉우리로, 나한님들이 모여있는 형상 같다하여 나한봉(羅漢峰)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선사의 높은 뜻이 깃들여진 준엄한 나한봉을 바라보노라면 천년의 사적이 궁금해 진다.

[학소대와 병풍바위]

경사 90도의 가파지른 절벽의 모습을 한 학소대(鶴巢臺)는 급수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있다. 해방전 이 정상지점에 청학 백학 한쌍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일인(日人)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아 버린후, 날마다 슬피 울면서 부근을 배 회하던 청학마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지금은 옛 보금자리만 남아있다. 또한 학소대 중간쯤에 수백년 묵은 풍채가 좋은 회양목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이 탐이나서 톱을 허리에 차고 암벽을 오르다가 떨어져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처럼 학소대는 애닯은 사연이 얽혀 있으며 주왕산의 경관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기암이기도 하다. 오른쪽의 바위는 마치 병풍을 세운듯하여 병풍바위라 부른다.

[급수대]

급수대는 망월대에서 50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37대 선덕왕이 후예가 없어서 무열왕 6대손인 상재 김주원을 38대왕으로 중대 및 각부대신들이 추대하였는데 즉위 직전에 돌연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고자 내란을 일으킴으로 김주원이 왕위를 양보하고 석병산으로 은신하여 대궐을 건립한 곳이다.

대궐터는 급수대 정상이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유적이 남아있다.

김주원이 대궐을 건립하여 은둔생활을 할 당시 산상에는 샘이 없었으므로 계곡의 물을 퍼올려서 식수로 하였으므로 급수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급수대앞 오솔길을 지나노라면 계곡쪽으로 기울어진 깍아지른 절벽이 금새 무너질듯하여 식은 땀조차 흐르게 된다.

[시루봉]

시루봉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같아서 시루봉이라 불리우는데 밑바닥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시루봉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한다.
옛날 어느 겨울철 도사가 이바위 위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멀리서 보면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연화봉과 연화굴]

봉우리의 형체가 흡사 연꽃 같다고 하여 연화봉(蓮花峰)이라 부르며, 이곳에서도 대전사의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자하성 뒷편으로 해서 개울가를 거슬러 올라가면
잡목으로 둘러싸인 연화굴(蓮花窟)에 이른다. 굴이라고 해서 그리 깊지는 않지만 너비3m, 높이5m, 깊이2m의 이 동굴속에서 주왕의 군사들이 훈련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이곳에서 성불했다는 이야기도 해진다. 뿐만 아니라 연화굴을 통과하는 시원스럽고 맑은 계곡의 바람은 현대문물에 찌든 현대인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제1폭포]

학소대를 조금 지나면 제1폭포(일명: 선녀폭포) 입구가 보인다. 옛날에는 이 폭포에 다다르자면 쇠사슬을 붙잡고 겨우 오르내렸는데 일제강점기 무렵 내원에다 제탄전습소(製炭傳 習所)를 설치하기 위하여 차도를 개설하느라고 그토록 아늑하고 신비하기 그지없었던 자연의 신비경을 훼손하여 버렸다고 한다. 폭포 주위는 암벽으로 둘러 싸여져서 바람한점 없이 고요하며, 다만 그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폭포소리뿐이다.
그 물보라 속에는 항시 오색무지개가 어리고 있어 당장 이라도 선녀가 하강할 듯 절경을 이룬다. 소(沼)는 70평 남짓하게 이루어져서 물고기떼가 놀고 있으며 옛 전설에 의하면 소 깊이가 명주꾸리 하나를 다 풀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암벽 틈바구니에는 기화요초가 보석같이 아름답게 피어 있으며, 암벽사이로 트인 구만리 장천엔 구름이 뭐 그리 바쁜지 쏜살같이 지나간다. 폭포 바로 위에는 선녀탕과 구룡소가 있으며,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신선대로 간다고 한다. 산 아랫마을 상의리에 가뭄이 심할 때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면 3일 이내에 비가 왔다고 한다.

제1폭포에서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고, 제2폭포와 제3폭포 및 아직도 전기가 들어 오지 않는

내원마을은 다음으로 기약하고 애들과 저녁을 같이 하기로 하였기에 서둘러 하산하였다.

올때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영천 IC를 빠져 나와 청송으로 들어 왔으나, 돌아오는 길은 죽장으로 해서 포항방향으로 진입, 경주 시외버스터미널방향으로 해서 왔다.

내일은 막내 데불고 경주에 와서 자전거 타잔다. 으

~

                                                     **![](https://t1.daumcdn.net/blogfile/fs11/19_blog_2008_10_22_13_48_48feb0a8e479f)**<_code><_p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