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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마지막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9. 09:48


[그림]Jean Andre Rixens(佛,1846-1924)◈The Death of Cleopatra(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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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죽음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악티움에서의 패배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전투 중에 자신의 함대를 퇴각 시켰는데 이는 전투에서
    패배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를
    그녀의 세 번째 애인으로 유혹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3번에 걸쳐 많은 보물과 돈을 보내면서
    자신의 희망을 전달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보내온 선물은 받으면서도
    그녀의 제안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최후의 담판을 위해 우여곡절 끝에 옥타비아누스를 만났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녀의 제안에 대해 단 한마디의 답변도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로마로 보내 길거리에서 쇠사슬로 묶어
    끌고 다니겠다는 말로 증오심마저 드러냈다.



[그림]Alexandre Cabanel(佛,1823-1889)◈Cleopatra Testing Poisons on Condemned Prisoners(1887)  





    옥타비아누스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실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독사에게 물려 죽음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최후의 자존심을 지킨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그때 여왕의 나이 39세였다.



[그림]Eugene Delacloix(佛,1798-1863)◈Cleopatra and the Peasant(1838)  




    틀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의 예견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림]Guido Reni(伊,1575-1642)◈Cleopatra(1635-40)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고 했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그림]Guido Reni(伊,1575-1642)◈Cleopatra with the Asp(1630)  






    그녀가 마지막으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내 유체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어 달라.
    나의 사후 아이들의 처리는 카이사르와의 약속만을 믿는다."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고 안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뤄 주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이집트는
    완전히 로마의 속주가 되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최후의 막을 고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케사르의 아이인 케사리온은 인도로 탈출하던 중 살해되었고,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들은 로마로 데려다
    안토니우스의 정실이었던 옥타비아에게 맡겨졌다.  



[그림]STANZIONE, Massimo(伊,1585-1656)◈Cleopatra(1630's)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림]Guido Cagnacci(伊,1601-1681) ◈ The Death of Cleopatra(1659-63)





    <영웅전>을 쓴 로마의 전기작가 플루타르크가 클레오파트라를 안토니우스를
    파멸시킨 교활한 여인, '나일강의 세이렌'이라고 부른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남자의 일생을 망치는 요부,
    혹은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콧대 높은 여자의 대명사로
    근 2천 년 가까이 선망 섞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Hans Makart(奧,1840 - 1884)◈The Death of Cleopatra(1875)  





    사실 로마인의 입장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오만하고
    도도한 요부임에 틀림없다. 로마의 영웅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조국 로마에게 창끝을 돌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니까.
    때문에 로마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클레오파트라를 평가절하했고,
    그와 견해가 다른 이집트측의 자료나 기록들을 없애버렸다.



[그림]Hans Makart(奧,1840 - 1884)◈The Nile Hunt of Cleopatra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정보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왜곡, 조작된 정보들이다.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모두가 확신하는 그의 연인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뿐이다.
    당시 로마 여인들의 난잡한 생활과 비교해본다면 그 둘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다."


    (BC 1세기. 수에토니우스)



    "이집트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이 빛나는 전설로 승화된다.
    그를 이집트의 가장 사려깊은 여인으로 칭송하고,
    국민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거대한 기념관에서 그를 기린다."


    (1990년. P.M.마르탱)

    그녀를 둘러싼 진실과 오해는 지난 2천년 동안 빛과 어둠처럼,
    해와 달처럼 극적으로 갈라져 왔다.




"끝"

 

2007-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