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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첫번째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9. 09:43


[그림]John William Waterhouse(英,1849-1917) ◈ Cleopatra(1888)







그림을 클릭하면 큰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요부인가 정치가인가?


    기원전 50년경 이집트 왕좌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그림]Charles Theodore Frere (佛,1814-1888) ◈ Crossing the Desert




    클레오파트라가 살았을 당시 이집트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장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세운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두 번 결혼했다. 첫 상대는 그녀의 남동생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는 기원전 51년 숨을 거두며
    그의 열여덟 살 된 딸 클레오파트라와 열 살 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라고 유언했다.

    남매간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결혼은 추종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클레오파트라가 우세했으나
    즉위한지 3년째 되는 해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옹호자들에게
    축출돼 시리아로 피신했다.



[그림]Gustave Moreau (佛,1826-1898) ◈ Cleopatra  





    이 당시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와 시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폼페이우스는 시저에게 패한 뒤 이집트의 지원을 얻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클레오파트라와 폼페이우스가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살해했다.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지 3일 후 시저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시저는 두 이집트 왕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자신에 복종할 것을 요청했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고자 계획을 세웠다.



[그림]Raffaele Giannetti (伊,1837-1915) ◈ The Last Senate of Julius Caesar





    클레오파트라의 생애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이다.
    당대 최정상에 오른 두 남자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운명적인 첫만남을 가졌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저를
    자기 측근으로 만드는 명장면을 연출한다.




[그림]Jean-Leon Gerome (佛,1824-1904) ◈ Caesar and Cleopatra(1866)






    위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남편이며 정적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단독으로 시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자 클레오파트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구상한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나체로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 것을 명령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로마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의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그녀가 시저의 궁에 들어가서 일어난 일을 다룬
    수백 가지의 전설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림]Jean-Leon Gerome (佛,1824-1904) ◈ The Death of Caesar(1867)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안고 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드라에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찍었다.



"계속"

 

2007-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