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Gustave Klimt(Austria,1862-1918)◈ Music I (1895)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다. 구스타프는 7형제중 장남이었으며, 일가는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클림트는 청년기에 이미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극장이나 미술관의 장식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미적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로 출발했으나 1900-1903년에 그가 그린 비엔나 대학의 벽화가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결국 이 벽화는 거부되고 말았다.
[그림]Gustave Klimt(Austria,1862-1918)◈ The Three Ages of Woman (1905)
이 벽화에서 그는 인간의 행로에 수반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이 추상적 패턴을 복합시켜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클림트 예술의 큰 특징은 세밀하고 아름다운 장식성과 여성의 이미지 표출이라 하겠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함은 여성의 초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매력과 신비적인 특질을 강조하는 클림트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그림]Gustave Klimt(Austria,1862-1918)◈Danae (1907-8)
다나에
클림트는 인간의 본능은 제거한 채 외적 아름다움만 그리는 이전의 관념에서 탈피해 인간의 내면 세계, 특히 생명의 근원이라 불리는 에로스를 황홀하게 표현한 화가로 유명하다. 클림트는 그의 대표작 「다나에」에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의 모습을 그 자체보다는 제우스에게 간음당함으로써 성적 황홀경에 도달하는 여인으로 그려 놓고 있다.
클림트가 여인의 성적 황홀함을 천착한 것은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 안의 커다란 자연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그 자연으로서의 여인이 여성의 본질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는 순간을 성적 황홀 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황홀은 죽음을 내부에 품고 있으면서 죽음을 초월한 상태이다. 따라서 클림트 그림의 성적 황홀은 죽음과 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림]Gustave Klimt(Austria,1862-1918)◈Serpents I/물뱀 1 (1904-7)
클림트는 이러한 여인의 황홀한 순간을 「다나에」말고도 「유디트」, 「바다뱀」 시리즈와 「처녀」, 「레다」 등의 작품에 담아 냈다.
그리스 신화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클림트가 그린 "다나에"는 독특한 신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손자가 외할아버지를 죽일것이라는 예언에 아크리시오스는 딸을 감금해 놓는다. 그러나 제우스가 황금의 물결로 다나에를 찾아와 수태를 시킨다. 클림트는 바로 이 장면을 환상적으로 묘사 하였다.
외부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두 다리를 올리고 자고있는 다나에를 성적존재로서의 여성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남근중심적 시각에서 여성을 그린 것으로 비난을 살지도 모른다.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한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그림]Gustave Klimt(Austria,1862-1918)◈Beethoven Frieze (1902)
Beethoven Frieze<베토벤. 후리즈>
그의 작품들은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베토벤. 후리즈]에서 보여준 것 처럼 선의 리듬을 나타내는 솜씨와 멋진 장식적 표현은 키스처럼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문양을 낳게 한 재능을 보였다.
베토벤 프리즈는 1902년 분리파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분리파 작가들은 전시장 전체를 베토벤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채우기로 했는데 클림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을 토대로 전시장 내에 임시 벽화를 제작했다.
작품의 주제는 예술과 사랑의 중재를 통한 가련한 인류의 구원, 행복을 희구하는 인류의 갈망과 적대적인 세력으로서의 괴물과 요부, 그리고 마침내 시와 예술속에서 행복의 갈망이 채워지는 결말로 그림들이 구성돼 있다.
클림트 특유의 장식성과 관능성이 매우 절제된 톤으로 세련되게 표현 된 작품이다. 인상적인 것은, 베토벤을 주제로 한 전시의 출품작임에도 인물로서의 베토벤이 잘 안 느껴진다는 것이다.클림트 자신의 색채가 워낙 강해 베토벤은 그 뒤로 가려져 버렸다.
클림트는 그가 처한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언제나 개인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항상 여유있고 풍성한 푸른 '수도사'스타일의 스모크를 입고 방랑하는 쪽이 성격에 맞을 정도로 보헤미안다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