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명화갤러리[명화·신화이야기]
사람들은 늘 무한의 자유를 꿈꾸며 산다. 하지만 공간의 제한을 받는 우리의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로울 것 같은 우리의 의식조차도 이미 어떤 조건들에 길들여져 있기가 일쑤다. 그래서 푸코는 인간들은 그를 둘러싼 타자가 만들어 놓은 구조나 법칙, 심지어 사고방식까지도 고착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훈련된 인식의 틀을 바꾸고자 도전한 화가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 마그리트(1898∼1967)다. [그림]Rene Magritte ◈ The Telescope 마그리트는 벽지 제조회사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1926년 문학가들과 초현실주의 그룹을 형성하고 1927년 이후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본격적인 이중이미지의 우연한 만남이나 환상세계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은 그려지는 대상의 세부확대,연관성없는 두 개 사물의 만남, 무생물을 생명있는 미술로 도치, 전혀 다른 모습의 생물체 변형 등으로 제작된다. 그는 서로 다른 의미의 사물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거나 사물이 갖는 고유의 이미지를 변형시켜 전혀 다른 의미의 초현실 이미지를 화면속에 탄생시키는 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준 작가이다. [그림]Rene Magritte ◈ Attempting the Impossible(1928) 우리가 흔히 현대 미술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은 당혹스러움이다. 아무리 역사가 소수의 선각자에 의해 움직여 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곤감할 수 없는 현대의 미술이라니! 이 시대는 분명 20세기말이되 아직도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들의 정서는 근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의 미적 기준은 아직도 고전적인 기준을 선호하며, 얼마나 실물과 닮게 그렸는가로 쉽게 작가의 역량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림]Rene Magritte ◈ The Blank Check (1965) 그림이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림에는 그것의 대상이 되는 실제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사물의 근원과 위계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옛날 플라톤은 그림이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 세계를 다시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이데아에서 한 단계 더 멀리 떨어져 있고, 그래서 저급한 활동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림]Rene Magritte ◈ Clairvoyance(1936) 이러한 믿음에 도전한 사람이 '르네 마그리트'이다. 그는 교묘하게 현실과 그림의 경계를 흐려 놓는다. 그는 우리가 당연한 현상이라고 보아왔던 것이 사실은 아주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잠들어 있는 우리의 무의식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 이를위해 그는 그림속의 사물들을 자연질서를 무시한 채 엉뚱하게 배치시키면서 충격을 받도록 하고 있다. [그림]Rene Magritte ◈The Treason of Images(1928-9) 'la trahison des images(The Treason of Images)'이라는 작품을 보자. 캔버스에는 파이프가 하나 그려져 있고, 그 밑에 "Ce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쓰여 있다. 참으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분명히 파이프를 그려놓았는데 파이프가 아니라니.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파이프 모양을 한 그림일 뿐이다. 단지 겉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것이 파이프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사물의 기원을 따지기 때문이다. 그림은 반드시 실제와 닮게 그려진 그림은 바로 그 대상이라는 믿음, 이것이 아마도 뿌리깊은 근대적 사고일 것이다. [그림]Rene Magritte ◈ The Human Condition I(1934) 다음은 이러한 우리의 믿음을 깨버리는 또 다른 재미있는 그림들이다. La condotion humaine(Human Condition) 창문의 커튼 밖으로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이 풍경은 창 앞에 놓인 캔버스에 의해 방해되고, 과연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알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 그림의 제목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은 흥미로다. 우리는 창틀과 캔버스와 같은 사고의 틀 속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지, 우리 인간이 바라보는 '실제'란 사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Rene Magritte ◈ The Key to the Fields(1936) The Key to the Fields. La Clef de champs는 창문의 유리가 깨어져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 그 파편에는 흥미롭게도 창 밖의 풍경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림]Rene Magritte ◈The Great War(1964) 미셸 푸코는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을 시대에 따라 4개의 '얇은 단층'으로 구분하였다. 16세기의 르네상스 시대, 17-18세기의 고전주의 시대, 19세기의 근대, 그리고 그 이후의 현대. 각 시기별로 인식의 기준은 뚜렷이 단절되어 나타난다. 근대인들은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역사의 추체가 되는 것은 인간이며 , 역사를 인식하는 주체 또한 바로 인간이다. 즉 근대에는 인간이 모든 사물의 잣대로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단절되었고, 더 이상 현대를 기술하는 잣대가 되지 못한다. 푸코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위대한 '현대'미술가란 이러한 시대적 단절을 뚜렷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림]Rene Magritte ◈Art of Conversation (1950) 르네 마그리트의 'L'art de la conversation(Art of the conversation)'이란 작품을 보면 두 사람이 거대한 돌무더기 앞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를 보면 REVE라는 글자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꿈이라는 뜻이다. 이 거석들 앞에서의 두 인간의 대화는 공허한 꿈처럼 사그라지는 듯만 보인다. 인간이 아무리 이성을 바탕으로 대화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의식과 환경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이다. 근대의 믿음이었던 인간의 자유의지란 한낱 꿈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어느 인간이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서 인간을 정점에 올려놓았던 근대적 인간관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물들 자체는 서로 기원을 따지지 않는다. 인간이 그것을 억지로 분류하고 서열을 메겼을 뿐이다. 실제 파이프와 파이프 모양의 그림은 대등한 사물이다. [그림]Rene Magritte ◈ Personal Values(1951-2) Les valeurs personnelles(Persional Value) 여러 사물들이 우리 일상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비례를 가지고 그려져 있다. 침대나 옷장보다 빗과 유리잔이 결코 작은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경중이 무너지면 결국은 그 정점에 올라가 있던 인간도 무너져 버린다. [그림]Rene Magritte ◈ False Mirror(1928) ‘허상의 거울’(1928)에서도 이런 작중의도를 읽을 수 있는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눈꺼풀 형체 안에는 둥그런 안구가 들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다시보면 그것은 하얀 구름이 떠 있는 맑은 하늘이며, 더구나 동공이라고 생각되는 중앙의 검은 원은 LP디스크처럼 보인다. 눈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눈과는 전혀 다른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그림에서 눈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인식과 지각이 얼마나 관습화되어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런 효과를 위해 마그리트는 뉴턴적인 만유인력법칙을 거부하고, 시간의 파악도 정지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생물이나 무생물조차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해 그림을 대상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림 그리는 철학자’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그는 그림의 역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한 그림의 영속적 영향력 같은 것에 무관심하였다. 처음 본 이미지는 결국 뒤의 느낌까지도 규제하기 때문에 첫 느낌에서 작품의 효용성은 끝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그리트가 이 그림을 그린 1928년에 TV수상기가 처음으로 75달러에 일반인들에게 판매되기 시작했고, 이 작품이 미국의 CBS 로고의 기본이 되었다는 점이다.그래서인지 나는 이 그림에서 밝아 보이면서도 차가운 TV영상매체의 이미지를 읽는다. 마그리트는 이미 당대에 TV시대의 도래뿐 아니라 컴퓨터 등의 사이버공간까지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트로이의 목마가 되어버린 TV는 어느결에 우리들의 집에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으며, 삶의 모든 영역을 헤집고 다니는 무분별의 교사가 되어 있다. 더구나 영상매체시대가 실제와 비실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구획을 무너뜨리면서 또 다른 혼돈의 공간을 만들어 내지는 않은지 두렵다. 행복과 생존을 위해서는 지식이 아니라 무지가 더 요구된다는 아나돌 프랑스의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의 독백만은 아닌 것 같다.
2005-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