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명화갤러리[명화·신화이야기]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83)는 프랑스 파리에서 제2제정기 행정부의 고등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화가 지망을 허락하지 않아서 한때 선원이 되려고 했던 마네는 17세 때 견습 선원의 자격으로 브라질 등지로 나가는 외항선을 타기도 했다. 남아메리카를 항해한 1850년 겨우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역사화가인 스승에게 반발하여 자유연구로 나아가 루브르미술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F.할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나 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림]E. Manet ◈ Claude Monet Working on his Boat in Argenteuil(1874) 재야파 미술의 거장인 토마 쿠튀르에게 사사한 뒤,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사실주의의 영향 하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미술에 대해 모던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당시의 고전주의 및 아카데미즘의 권위와 빈번히 충돌하였다. 마네의 이런 태도는 주위에 많은 젊은 화가들을 모여들게 하여 인상파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화가가 대중과 만나는 자리는 살롱전이어야 한다고 믿고 인상파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림]E. Manet ◈ Music in the Tuileries(1862) 뛸르리 궁전의 정원에서 벌어진 호젓한 음악감상 모임에서 마네의 친구들인 파리의 신사, 숙녀들이 정겹게 모여있는 광경을 그린 이 작품은 야외에서 풍경이나 인물을 직접 대상으로 그려본 하나의 시험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자연의 볕살을 표현하기 위해 무척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왼쪽에 짝안경을 쓰고있는 이의 뒤쪽에 있는 이가 마네 자신이다. [그림]E. Manet ◈ Le Dejeuner sur L'Herbe 풀밭 위의 식사 (1863) 1863년 낙선작 전시회에서 비평가들의 입담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작품으로 마네의 회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생활의 한 정경으로부터 나체를 등장시키는 주제의 대담성은 당시의 전통 규범에 '저질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며 큰 이슈를 낳았다. 이 작품은 여인들의 피부 살갗을 통한 밝음의 표현과 남자들의 어두운 색채를 평면적으로 포착함으로써 인상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물의 포즈와 배치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만든 동판화 파리스의 심판에 따른 것이었다. [그림]E. Manet ◈ The Balcony(1868-9) 발코니의 네 남녀, 이들이 왜 이곳에 모였는지? 네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표정도 다르며, 대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이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림이다. 이 작품을 1869년의 살롱에 출품했는데 시에스노는 "일반인들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백, 청, 흑의 색조가 아름답고, 특히 청색의 난간이 툭 튀어나와 발코니임을 입증시켰다. 마네는 불로뉴에 체제중 발코니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이 장면의 역광 효과(逆光效果)에 흥미를 느껴 모티브로 택했는데, 모델은 머리에 꽃 장식을 꽂고 녹색 양산을 든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이 부인의 음악 친구이며, 남자는 카페 게르보아의 친구 화가인 기르메, 어둠 속에 있는 소년은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이다. [그림]E. Manet ◈ Moonlight over Boulogne Harbor (1869) 이 작품에서 마네는 자신이동경하였던 바다와 항구를 소재로 삼았다. 마네는 1869년 여름, 불로뉴 항에 머물면서 이 그림을 그렸는데, 항구의 한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밤 풍경을 직접 그렸다. 밤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세부가 어둠 속에 묻히기 때문에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네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시각적인 탐구를 위하여 이러한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네가 달밤에 포착하고자 한 것은 형태나 양감, 원근법이 아닌 달빛이 자아내는 효과였다. 만월이 비추는 부둣가는 밤이 깊지 않은 새벽녘이나 저녁 무렵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싸여 있는 선박들과 인물들, 그리고 달빛을 환하게 받은 지면, 음영의 대조가 강렬하기까지 하다. 과감하게 생략된 데생과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의 분명한 대조, 그 결과 그림은 평면적으로, 미완성된 듯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과거 미술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다. 종래의 화가들이 중간 색조를 꼼꼼하게 단계별로 칠하면서 명암을 표현하고, 3차원적인 형태감을 중시하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회화 기법이다.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포착하는 데 초점을 둔 이 그림은 모네의 <해돋이, 인상>에 앞서 빛과 자연 대상을 진지하게 탐구한 작품이다. 두 작품은 항구와 배, 빛이라는 모티프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느낌을 잡아내고자 한 시도 등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제1회 인상주의전이 1874년에 열렸던 것을 생각할 때, 1869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인상주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림]E. Manet ◈ The Railway(1872-3) 파리 시내를 철마(鐵馬)가 달리던 1830년 대 말, 철도를 둘러싼 여러 정경들이 새 시대를 알리는 풍속으로, 도미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모티브로 채택됐다. 방금 철책너머로 연기를 남긴 채 사라진 기차를, 곱게 차려 입은 소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 옆에 어머니로 보이는 책을 든 부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목 언저리와 부인의 얼굴이 감미로운 해조를 이루고, 소녀의 흰색에 가까운 회색 옷과 부인의 검은 옷이 대조되면서 상이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읽게 하고 있다. 마네는 이 회화 언어(繪畵言語)로 이별을 그린 모양이다. 구시대(舊時代)와 새 시대의 이별을. 이 작품이 <철도에서>라는 제목으로 1874년의 살롱에 출품되자 찬반 양론으로 갈려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림]E. Manet ◈ The Fifer (1866)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이다 [그림]E. Manet ◈ Blonde with Bare Breasts(1878) 마네의 그림 가운데에서도 특히 유명한 작품의 하나로서, 그가 곧잘 쓰는 크림 빛 아닌 볼그스레한 피부의 아가씨는 한결 고혹적이다. 대담한 필촉으로 사뭇 조형적으로 포착한 이 그림은 마치 공기와도 같이 가볍게 표상하면서도 튼튼하고 짜임새 있는 터치를 도처에 가미시키고 있다. 살결 빛깔이 두드러지게 아름다워 보이는 이 여인은 마치 진주처럼 빛나 있고, 그 광휘는 담록(淡綠)의 배경으로 말미암아 한결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빛 속에 녹아내린 핑크와 백색의 육체는 귀스타브 제프 로아의 말을 빌린다면,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육체의 아름다운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과 과실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모델 이름은 마그리트이다. [그림]E. Manet ◈ Le serveuse de bocks /The Waitress(1879) 마네는 46, 7세 때 자연주의적(自然主義 的)인 테마를 취급한 8점의 유채화와 카바레, 카페 등의 수많은 데상을 남겼다. 이 그림도 그 때의 작품인데, 당초는 <카페에서>와 함께 한 점의 대작으로 그리다가 완성 단계에서 2점의 작품으로 쪼갰다. 후면인 무대에는 한창 춤을 추는 무용수와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악사들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맥주를 나르는 여종업원의 시선과 술잔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는 상념에 잠긴 남자의 시선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실내 조명(室內照明)을 받아 붉은 색으로 변한 얼굴들과 홀을 메운 손님들이 지껄이는 소리, 음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들려오는 듯한 흥겨운 분위기와 음악적인 효과가 엿보인다. 마네와 그의 친구들도 이 술집에서 자주 만났고, 또한 화상(畵想)을 얻었다 한다. [그림]Edouard Manet(佛, 1832-1883) ◈ Olympia (1863) 올랭피아(Olympia) 이 그림이 그처럼 유명한 이유가 뭘까? 화면엔 한 평범해 보이는 여인이 발가벗고, 침대에 두 겹으로 쌓은 베개에 기대 비스듬히 누워 이 쪽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한편 같은 1863년,카바넬(A. Cabanel,1823~1889)에 의해 '비너스의 탄생'(참고도판 참조)이 그려졌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겐 올랭피아보다는 비너스가 훨씬 몸매가 늘씬하고 피부도 매끈해 보이며 성적 매력이 강하게 느껴져 온다. 게다가 비너스가 이마를 가린 오른 팔 아래로 우리에게 보내는 그녀의 고혹적인 눈길을 보라.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그림]Alexandre Cabanel(佛, 1823-89) ◈ The Birth of Venus(1863) '에로틱'과는 거리 먼 누드 1865년 '올랭피아'가 살롱에 처음 전시되었을 때 세간의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고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반면 '비너스의 탄생'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비싼 값에 구입되었고, 1867년 파리의 만국 박람회 때는 프랑스 문화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전시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미술사는 주저 없이 '올랭피아'를 훨씬 더 중요한 그림으로 평가하며 지금도 그 의미를 새롭게 되새긴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의문을 나폴레옹 3세나 나의 속물 취향 탓으로만 돌릴 수 없어 보인다. 먼저 '올랭피아'는 르네상스 이래 그때까지 거의 최초로 현실의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실제의 여성을 누드로서 표현하였기 때문이었다. 올랭피아는 길게 가로로 누워있고 오른 쪽 코너에 흑인 여성과 검정 고양이가 그려져있다. 흑 백 대조가 무척 강한 그림이다. 당시 여성의 나체는 신화의 여신을 이상화하는 것이 전부였으나, 마네는 작품 속의 여인을 창녀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냈다. <올랭피아>라는 제목은 친구인 아스튀르크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그림]Adolphe William Bouguereau(佛,1825-1905) ◈ The Birth of Venus(1879) 그 이전까지,아니 '올랭피아'가 그려지던 당시에도 누드화에는 신화 속의 인물들이,그 것도 이상적인 나체들로 그려져야 했으며, 에로틱한 느낌이 물씬물씬 풍겨나야 했다. 그런데 마네는 이런 관습을 거부하고 현실 속에서 실제 만날 수 있는 여성의 벗은 몸을 들이 밀어 누드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모델이 창녀임을 당당히 드러내다 하지만 더 큰 소동은 이 여성이 창녀라는 데 있었다. '올랭피아'는 당시 창녀들 사이에 유행하던 이름의 하나였고, 벨벳 끈 목걸이 역시 당시 무희나 창녀들이 애용하던 장식이었다. 그 뿐만 아니다. 머리에 커다란 붉은 꽃을 꽂은 것 하며 손으로 음부를 가린 모습에다, 당시 자유분방함과 난교를 시사하는 검은 고양이를 화면 가장자리에 배치해 둔 것을 보면 화가는 그림의 여인이 창녀라는 것을 굳이 의도적으로 강조한 듯 하다. 다시 그림을 보자. 흑인 하녀가 고객이 보낸 듯한 꽃다발을 들고 올랭피아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핀다. 그녀는머리를 반듯하게 세우고선 차갑고 도도한 시선으로 화면 밖의 방문자인 자신의 고객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그 고객은 또한 당시 파리의 귀족들과 부유한 시민들이기도 했다. 어쩜 저렇게 냉소적인 시선을 그들은 '올랭피아'에 이중으로 불쾌하였고 분노하였다. 먼저 아무리 누드라 할지라도 자신들과는 계층이 현격한 창녀의 있는 그대로의 벗은 몸을 감상한다는 건 어딘가 찜찜하고 불편하였다. 게다가 그녀의 눈초리는 다소곳하거나 애교스럽기는커녕 자신들과의 대등함을 넘어 오히려 위압적이고 냉소적이기까지 하니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거북하게 하고 당혹스럽게 만든 건 그림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게끔 하며, 매춘의 의미가 무엇인지 직시하게 한 데 있었다. [피스텔화]E. Manet ◈ Young Woman in a Negligee(1882) 1860년대 파리에는 인구 100만 명당 3만 5천 명 가량의 매춘부가 등록되어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공창제도가 있어 이 정도의 파악이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파리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등급의 매춘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그 가운데 상당수는 등록이 되지 않아 전체 숫자는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연히 매춘에 대한 남성들의 수요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고, 매춘이 도시의 일상적인 사건이었음을 뜻한다. 마네는 이 공공연한 일상의 비밀을 '올랭피아'를 통해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보여주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였다. 결국 파리의 시민들도 자신이 '올랭피아'의 관람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매춘산업의 주요 고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불쾌감 속에서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올랭피아의 팔찌에 달려 있는 조그만 둥근 부착물은 로켓(locket)이다. 이것은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다른 파트너가 있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관람자이자 고객인 남성은 그녀에게 돈을 지불하고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올랭피아는 애써 억지 미소를 지을지 모르겠으나 이내 표정은 일그러지고 괴로워할 것이다. 사실 그녀와 고객 사이에 성과 돈의 매매관계 외에 개입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올랭피아의 저 냉소적이고 쏘는 듯한 시선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림]E. Manet ◈ A Bar at the Folies-Bergeres (1881-2)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중앙의 우울한 표정을 지닌 젊은 여인과 그 옆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 실크 모자를 쓴 남자 등의 배치가 재미있다. 우울에 젖어 있는 여인과 서로 공유하기를 꺼리는 배경의 화려함은 마네의 근대적이고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을 드러낸다. [그림]E. Manet ◈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7) 만년에는 레지옹 도뇌르훈장을 받았으나, 류머티즘으로 고생하여 육체적 피로도가 비교적 적은 파스텔화(畵)를 그렸으며《막시밀리안의 처형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 (1867)등 유화의 걸작을 남기고 51세의 생애를 파리에서 마쳤다. [그림]E. Manet ◈ The Dead Toreador (1864-5)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주위의 활기 있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필력에서는 유례 없는 화가였다.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역을 수행한 점에서 공적이 크다.
200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