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여행의 추억/해외여행

[2007년 5월] 캄보디아 씨엠립 - 앙코르톰

인생멘토장인규 2007. 5. 28. 13:25
여행지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톰/앙코르와트
여행기간
2007.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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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스토리

어제 비가 내려서 프놈바켕사원과 그 아름답다는 일몰의 광경을 보지를 못해 아쉬웠는데, 간절히 바랬건만 새벽일찍 호텔을 나설 때 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가이드가 프놈바켕사원은 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는 말에 실망을 하고 앙코르유적지 관광에 나섰다. 오전에는  거대한 '앙코르톰'의 남문을 통과하여 바푸온사원, 바이욘사원, 코끼리테라스,프레야칸,피메아나카스사원,타프롬사원 등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앙코르와트사원을 관광하였다.

씨엠립관광을 마치고 다시 캄보디아 국경도시인 포이펫으로 이동- 이동 중에 계속 비가 왔다 갔다 했다- 국경지역의 트로피칼호텔에 도착하여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 앙코르에 대하여

앙코르[Angkor]

캄보디아 서북부에 있는 세계적인 고고학 유적지다. 지금의 씨엠립 북쪽 6㎞ 지점에 있다. 9~15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다.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수리아바르만 2세(1113~50경 재위)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와트와 자야바르만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함)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부를 이용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되었는 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교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져나갔다(→ 불교).

 

  

근대 이전에 세워진 동남아시아의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앙코르도 통치의 중심지이자 신격화한 왕을 숭배하던 곳으로서, 인도에서 들여와 지역적 전통에 맞게 고쳐친 종교적·정치적 개념에 의거해 계획·건설되었으며 여러 번 재건되었다. 이 도시에 '야소다라푸라'라는 원래의 이름을 붙인 야소바르만 1세 때부터 앙코르는 인도의 전통적 우주론이 제시한 모델에 따라 세워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도시는 중심부 산, 즉 피라미드형 사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우주론에 등장하는 메루 산과 동일시되었으며 동시에 왕국의 번영이 달려 있는 토양의 힘을 집중시킨다고 믿었다. 야소다라푸라로 명명되었을 당시의 중심부 산의 사원은 그 지역에 있는 자연 언덕인 프놈 바켕을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건축물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전적으로 인공적인 건축물, 즉 피라미드 사원이 되었다.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야바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바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이욘 등이 있다. 특히 바이욘은 자야바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무렵에 도시는 앙코르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때에는 앙코르의 주요특징인 방대한 저수지·운하·해자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수량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우주론적 사고와 도시 자체의 관계는 도시의 주요거주민과 신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설정되었다. 중심부의 산 또는 피라미드나 사원은 '데바라자'라고 불리는 신격화한 왕이 주재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은 위대한 절대적 신격의 하나로 동일시되었고, 이런 동일시는 왕이 죽었을 때 중심부 사원을 왕의 개인 장례용 사원이나 무덤으로 삼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앙코르에 있는 다른 많은 사원들 역시 인도의 우주론과 신화적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중심부 사원을 새로 짓지 않은 왕이나 실질적 통치자가 아니었던 왕가 구성원, 또는 몇몇 경우에 특정 귀족들이 시바 신이나 왕국에서 섬기던 다른 주요신과 자신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숭배장소로 세워 졌다. 예를 들면 앙코르 유적의 사원 가운데 가장 거창하며 유명한 앙코르와트는 수리아 바르만 2세가 자신의 유해를 안치하고 상징적·종교적으로 비슈누 신과 자신을 영원히 동일시할 수 있는 거대한 소우주의 건축물로 세운 것이다.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코르와트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와트는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캄보디아를 찾았던 초기 유럽의 방문객들은 '잃어버린 도시'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으며, 1863년 프랑스의 식민정부가 세워지자 이 유적 전체는 학문적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재능있고 헌신적인 프랑스의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은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이후에는 정부가 지원하는 프랑스 극동학교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앙코르의 역사와 생활을 이끈 흥미진진한 종교와 정치체계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많은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고생스럽고 힘든 복원계획을 실행함으로써 고대의 사원·저수지·운하망을 원래의 장관에 어느 정도 가깝게 복구했다. 1960, 1970, 1980년대초에 일어난 캄보디아의 정치적·군사적 소요 기간에 앙코르의 사원들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도굴당하기도 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방치되었다는 점이었다. 적절한 관리 부족으로 건물들은 급속하고 무성히 자라는 식물과 침식을 유발하는 물, 기타 자연현상으로 황폐해졌다.

 

◈ 앙코르의 발굴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앙코르와트와 앙코르 톰을 건설한 앙코르 왕국은 9세기 경 (1천 2백년 전)부터 15세기까지 약 600백여 년간에 걸쳐 고대 크메르인이 메 콩 델타, 라오스, 태국에 이르는 광대한 국토를 가진 국가를 건설한  고대 왕국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 후 여러 가지 추측 속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체 수 백년 동안 밀림 속에 서 잠자고 있었던 신비를 간직한 고대 왕국이었다고 한다. 

 

앙코르 왕국에 어느 때 전염병이 돌아 인구가 전멸을 해 버리고 외부 사람들은 전염병이 무서워 접근을 하지 않고 그곳에 가면 죽는다는 전설에 의해 금단의 지역이 되면서 인간들의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는 추측,

앙코르의 그 많은 유적을 세우려면 무수한 노예가 필요했고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민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탈출을 해버려 사람이 하나도 없는 버려진 도시가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밀림에 파묻혀 버렸다는 추측,

 샴 족이 쳐들어와 모든 주민을 죽이고 포로로 끌고 가면서 도시는 버려 놓고 가서 버려진 도시로 잊혀졌다는 등의 여러 가지 추측이 있으나 글로서 기록된 것이 없어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버려진 도시가 다시 세상에 얼굴을 들어낸 것은 1980년 프랑스의 나비 채집 가 앙리 무어가 캄보디아 인들을 데리고 톤레삽 호수에서 밀림 쪽으로 나비 채집을 하다가 밀림 속에서 이상한 건물을 발견 캄보디아 인들과 같이 가려 했으나 이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이 숲 속에 들어가면 저주를 받아 불에 타 죽느니 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설득하여 가보니 고대의 유적이 우뚝 서 있었다. 캄보디아 인들은 땅에 엎드려 보려고도 하지 않아 무어 혼자서 유적 꼭대기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니 끝없는 밀림 사이로 언 듯 언 듯 건축물들이 보였다.

 

프랑스로 돌아간 무어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아무도 그런 밀림 속에 유적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 미친 사람 취급을 하기까지 했다. 무어가 죽고 얼마 후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앙코르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지금까지 발굴 복원 된 것은 전체 앙코르 유적지의 30% 정도로  아직도 수많은 유적이 밀림에 묻혀 있다고 한다.

 

◈ 앙코르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앙코르 톰 (ANGKOR THOM) 은 커다란 도시라는 뜻으로 이 곳은 하나의 유적만 있는 곳과는 달리 성곽안에 여러 유적들이 모여있는 사원이 아닌 해자로 둘러 쌓인 지역전체를 의미한다. 앙코르톰은 3차에 걸쳐 지금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었는데, 1차 왕도는 야소바르만왕때 앙코르톰남쪽에 있는 프놈바켕을 수미산으로 정하였고, 그 위에 사원을 세우고 씨엠림 강을 겐지스강으로 택하여 장대한 도시를 이루었다. 2차 왕도는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 왕도의 중심을 프늠바켕 북쪽으로 옮기고 피미아나까스 사원을 건립하였다. 3차 왕도는 자야바르만 7세때 지금의 형태로 건립 되었는데 새로운왕도를 중심으로 바이욘 사원을 건립하고 이곳을 신화에서 나오는 수미산으로 선정하였다. 이 왕도는 강국으로 성장한 미얀마의 침략을 막기위해 높은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요새로 지어졌으며 성벽은 히말리야의 영봉을 해자는 대양을 상징한다.앙코르톰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총 5개로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은 앙코르왓쪽에 길과 연결되는 남문으로 들어오게 된다. 앙코르톰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해자를 넘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의 양쪽에는 원추형의 모자를 쓴 신(神)과 투구를 쓰고 있는 악마가 머리가 7개인 나가라는 뱀을 잡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도열해 있다. 앙코르톰 안에는  바이욘 사원, 레퍼왕 데라스, 코끼리 데라스, 바푸온사원, 피미아나까스등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앙코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의 '나가라'에서 변형된 것이고, '톰'은 '크다'라는 의미로 '큰 도시'를 의미한다. 앙코르 톰은 기존의 사원과 왕궁 등의 주위에 자야바르만 7세가 성벽을 세움으로서 왕성을 요새화 하는 역할을 하였다. 총 면적 144㎢이며, 외각으로 폭 100m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이는 적의 공격이나 동물들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였으며, 약 1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앙코르 톰 안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난 문과 이에 연결된 다리를 건너는 구조로 되어 있는 앙코르 입구의 탑에는 각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4개의 거인 얼굴상이 있고, 그 밑으로는 각 방향으로 인드라 신의 좌상이 머리가 3개인 3m 높이의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 남문

 새벽일찍(06:30분경) 도착하니 관광객은 없어 조용하였으나 , 이놈의 비가 문제다.

폼잡고 사진을 찍을려해도 어둑한 데다가 비까지 쏟아져 이 거대한 유적들을 제대로 볼 수나 있을려나...

남문입구 양쪽을 보면  왼편에는 고깔모자를 쓴 신들이 반기고 오른편에는 악마의 형상을 한 조각상들이 다리위에 도열해 있다.선신(善神)과 악신(惡神) 이 나가신의 몸통을 양쪽에서 줄다기 하듯 잡고 있는 데 각각 54명으로 바로 108 번뇌를 상징한다고..

입구를 지나면 바이욘사원이 나온다.

▶바이욘사원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앙코르 지역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원 중의 하나이다. 바이욘 사원의 특징은 200여 개의 얼굴로 구성된 54개의 탑들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얼굴들은 사임(Sand Stone)을 조각한 것인데 이제는 기후의 영향으로 회색 빛으로 바랬다. 초기에는 이 얼굴이 힌두교의 창조의 신인 브라마의 얼굴이라고 믿어졌으나,건립자인 자야바르만 7세가 불교를 국교로 하여 불교의 자비로운 보살의 얼굴로 간주되기도 하였고,최근에는 프레아 칸 사원과 타프롬 사윈의 의미와 연관하여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로 해석하기도 한다. 보조물의 내용은 톤레삽 호수의 생활 및 샴족과의 전투을 묘사한 것으로 군인,가마병,음악가,코끼리 그리고 농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3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7세가 전승을 기념하고 전사자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며 남북 140m, 동서 160m의 회랑(回廊)과 보조회랑으로 된 복잡한 구조이다.

 

▶바푸온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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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톰 안에 있는 사원으로 앙코르톰이 지어지기 이전인 11세기에 건립된 힌두교사원.

지상으로부터 43m높이에있는 이 신성한 사원은 사암으로 된 회랑이 집중화하는 첫 번째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원에는 황금의 '링가'가 모셔져 있고,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한 장군이 이곳에 와서 왕에게 충성을 서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보수공사중으로 내부 출입은 금지다.

Udayadityavarman 2세에 의해 건설 되었으며 정교하기보다 피라밋을 연상시키는 사원으로 그냥 밖에서 보면 밋밋한 피라밋 모양이고 제일 위 부분은 돔 형태이다.그러나 내부는 수 많은 아름다운 浮彫로 이루어 졌다고 하나 볼 수 없으니....

당시 샴(현재의 태국)과 크메르왕은 형제간으로 샴의 왕자를 크메르에 맞기나 크메르의 신하들은 이를 모략이라 여기고 아이를 살해하려 한다. 이에 성질이 난 샴의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크메르를 손봐주기 위해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착한 크메르 왕비는 이 사원에 왕자를 숨겼다 하여 "숨긴 아이”라는 뜻의 바푸온(Baphuon)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수미산을 형상화한 모습이라 한다. 프랑스에서 지원을 하여 보수공사를 하고 있으나 도저히 옛 방식으로는 어려워 시멘트로 중앙을 보강하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어 언제 완공이 될지...

 

Phimeanakas Temple; 피메아나카스 사원

이사원은 라젠드라바르만 2세(944-968)에
의해 지어졌으며 산스크리트어로 “하늘의 왕궁”이라는 뜻으로 왕실을 위한 사원이다.

원나라 사신으로 앙코르를 보고 기록한 주달관의 기행문이 객관적 자료로 많이 인용된다.
트래블게릴라의 자료를 참고해서 옮겨보면  “주달관에 기록에 의하면 이 사원의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된 뽀족 탑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곳은 다른 사원에 비해 작지만 아담하고 매력적인 건물로서, 주변경치에서 목가적인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건축을 시작하여 그 다음 대의 왕에가서도 계속 건축되었던 것 같으며, 11세기의 수리아바르만 1세에 와서는 가장 중요한 사원이 되었다. 이 사원에는 9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정령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뱀의 정령이 여자로 변장하여 왕이 그의 왕후와 후궁들에게 들기 전에 뱀의 정령과 동침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왕이 하루라도 빠뜨리는 날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크메르 왕가의 혈통에는 신성한 뱀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전해져왔다.”

▶코끼리테라스,레퍼왕테라스(Elephants Terrace & leper king Terrace)

왕궁으로 가는 관문

  

왕궁의 정문인 동쪽 입구에 약 350미터 가량 늘어선 단상으로서 왕의 행사나 군인들의

사열을 관장하던 곳이다. 동쪽 광장을 향하고 있는 단상은 3개인데 양 옆은 코끼리들이 부조되어 있고 중앙쪽의 단상은 가루다(인도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새)가 받치고 있다. 코끼리 테라스에 올라가면 서쪽 아래 중앙광장이 한눈에 보이게 되는데 과거 이곳의 영광스런 모습들이 금새 떠올려지게 된다. 또한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과 기품을 가진 왕의 위용을 느낄수 있게 해 준다. 광장 앞쪽 맨 끝에는 12개의 탑이 우뚝 서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맹스런 군인들의 모습과도 같아 당시 파수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 탑들 뒤에는 끄레앙(Kleangs)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창고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접대한 곳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큰 곳이다.

  

각종행사의 공공장소로 이용되었던 이 테라스는 높이 3m, 길이 300m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5개의 계단을 통해서 올라간다. 테라스의 벽면에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코끼리 상이 부조되어 있고, 테라스의 뒷면에는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말이 부조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왕이 등장하여 위치하는 곳은 코끼리 조각상이 아닌 가루다와 사자상들이 받치고

있으며, 승리의 문, 왕의 출입문 과 일직선상으로 형성되어 특별함을 더한다.

레퍼왕 테라스의 높이는 7미터 가량 되며 맨 꼭대기에는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의 진품은 프놈펜 중앙박물관 정원에 위치해 있다. 이 조각상의 모습은 우아한 수염을 가진 온화한

모습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레퍼(Leper, 문둥이)왕이란 한 승려가 왕 앞에 엎드리기를 거부하자 그 왕이 승려를 죽였는데 그때 승려의 침이 왕에게 튀어 문둥병에 걸렸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왕으로, 자야바르만 7세라고 추정되며 이 조각상은 그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곳은 왕의 사후를 위하여 건립되어 왕의 유골이 안치되었을 것이라는 일설도 있다.
단상 외벽의 모퉁이에는 코브라 형태를 가진 나가들이 지키고 있고, 벽면에는 압살라들과 가루다들이 빼곡이 부조되어 있다. 또한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따쁘롬(Ta Prohm)사원

타프롬 사원은 불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한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 톰을만들기 이전에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며 건축한 불교한 사원으로 1186년에 건축하였다. 왕의 사후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개축되었다. 한때 이 사원 안에는 8만 명의 사람들이 3천개의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다른 앙코르 사원과는 달리 이곳은 수도원의 기능이 강화되어 있는 사원으로 보수를 하지 않아 자연 상태 그대로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곧게 솟은 이엥 나무와,사원의 벽과 기둥을 휘감고 뒤엉킨 뿌리가 사원을 들어올리는 스펑(spoan) 나무가 울창한 이곳은 마치 지옥의 사원을 연상케한다. 사원은 사암으로 된 단층의 건축물로 되어있고,부분적으로 황토가 섞인 5개의 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울창한 수목과 이끼가 덮인 벽,뿌리가 파헤치며 들어 올려진 사원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문명의 흔적을 탐험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몇몇 곳은 붕괴의 위험이 있으므로 관광객들은 주의해야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폐허 자체가 가지는 아름다움으로 하여 오히려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 곳이다. 거대한 나무들이 벽과 지붕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담을 넘고 문을 감싸며 절묘하게 보존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자연과 인간이 합심하여 빚어낸 예술의 극치와도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일부 보존론자들은 이 사원을 보수하는 것은 오히려 사원을 망치는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이곳은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영화 '톰레이더2'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타프롬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건립한 사원이다. 자야바르만은 뚜렷한 신분 세력 때문에 자기를 싫어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불교를 받아들이고 자기를 부처라고 했으며

자기 어머니를 위해 사원을 건립하였으나 보지 못하고 타계하자, 자그마한 방을 만들어 놓고

어머니 생각만 나면 그 방으 로 들어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실제 그방의 벽에 붙어

가슴을 치니 쿵쿵하고 울린다.  방 아래가 비어서 그렇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