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명화갤러리[명화·신화이야기]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 '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9. 12:42


[그림]Edouard Manet(佛,1832-1883) ◈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7)  






그림을 클릭하면 큰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1867년 사람들이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탄성을 지르며 즐기는 동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고,
    『르 피가로』가 7월 8일자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희곡 작가 루도빅 알레비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즈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유혈이 낭자한 미친 멕시코 전쟁은 이처럼 슬픈 결말로 종료되었다.


    공화주의자인 마네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장면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제목으로
    캔버스에 가득 채웠는데 이런 구성방법은 고야의 영향이었다.



[그림]Francisco de Goya (Esp,1746-1828) ◈ May 3, 1808(1814)




    1808년 3월 나폴레옹 1세(Napolon I, 1769-1821)는 마드리드를 점령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마드리드 민중이 5월 2일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상당수의 프랑스군이 살해되자 프랑스군은 보복을 감행했다.

    무기를 소지한 채 체포된 스페인人은 군사 재판 후 처형되었다.
    8명 이상의 집회는 모두 금지되었다. 프랑스人이 살해된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마을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5월 3일 마드리드 곳곳에서 많은 스페인人이 처형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고발과 분노를 화폭에 담은 것이
    고야(Francisco Jos de Goya y Lucientes)의 '1808년 5월 3일' 이다.

    이 사건 직후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인
    조셉(Joseph)을 스페인 왕에 앉혔다.

    마네는 고야가 1814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쪽에 그리고
    사형당하는 사람들은 왼쪽에 구성했다.

    마네 그림의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도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했는데 마네는 황제의 처사에 매우 분노했다.

    그는 그림에 처형된 날자 6월 19일을 적어 넣었다.
    마네는 이 그림을 이듬해 국전에는 출품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물의를 염려한 때문이다.
    이 그림은 1879년 뉴욕의 호텔에서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림]Pablo Picasso(Esp,1881-1973)◈Massacre in Korea(1951)





    훗날 피카소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한국에서의 대학살>(1951)을 그렸다.
    피카소는 1937년에 <게르니카>로 조국의 동란을 기소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알렸는데 한국에서 동란이 일어나자
    고야와 마네의 전례를 따라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그림]Edouard Manet(佛,1832-1883) ◈ 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7)






    마네는 1867년 9월 늦게 막시밀리안의 처형장면을 다시 그렸는데
    그림을 구성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습작한 4점은 현재 런던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두 장군들 사이에 선 채 처형을
    당하고 있는데 실재 처형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네의 의도대로 구성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마네는 고야와 마찬가지로 처형당하는 사람들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평행으로 구성했다.
    이 작품에 관해 르누아르는 훗날 화상 볼라르에게 말했다.

    “이 그림은 완전히 고야다. 하지만 마네는 마네가 아닌 적이 없었다.”

    마네는 1년 반 동안이나 유화와 석판화로 이 비극적인 사건을 폭로했다.







 

2008-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