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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8. 13:46


[그림]Gericault, Theodore (佛,1791-1824) ◈ The Raft of the Medusa(1818∼19)







그림을 클릭하면 큰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기 우리를 구할 배가 오고 있다


    이 그림은 배가 침몰한 후 뗏목을 타고 죽음과 굶주림 속에서
    바다를 표류하다가 구조되는 선원들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배 메두사호는 1816년 세네갈 해상에서 파선을 해
    뗏목에 사람들을 태워 바다로 내보냈는데, 결국 선원과
    승객 149명 중 15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무자격 선장이 운행을 한 탓에 일어나게 된 이 사건은 굶주림, 병마,
    갈증, 악천후를 겪으며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과 동정을 일으켰다.

    제리코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파선의 몸체를 연구하고,
    실제로 목수를 시켜 뗏목을 만들게까지 했다.

    또한 살아남기 위해 동료의 살을 먹은 이야기며,
    죽어 가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제리코는 병원에서
    시체와 병자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흐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돛을 단 배는 강풍과 높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터번을 쓴 남자는 사람들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매고 있으며,
    뗏목 여기저기에는 시체들이 흩어져 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 돛대로 보이는 물체가 나타나자 물통에 올라가
    옷을 흔들며 구원의 요청하는 사람들이 보이며,
    환자들도 이에 일어나려 애쓰는 장면들이 보인다.

    제리코는 이 그림에서 메두사호의 뗏목에 탄 사람들이 표류 끝에
    구조를 받게 되는 순간의 환희를 담으려고 했다.

    거대한 캔버스에 담긴 이 작품은 대각선이 서로 교차하는 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인물들의 동작 또한 개성적이며 다양하다.


    1819년 살롱을 발칵 뒤집어놨던 이 작품은 호평과 동시에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악평을 함께 받으면서 제리코는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메두사의 뗏목>은 후에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미술을 절정에
    이끌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는 위대한 작품이다.



    "1816년 여름,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할 목적으로
    '에코Echo', '라 르와르La Loire', '아르귀스 L'Argus'라는 이름의
    군함 세 척을 대서양에 띄웁니다. 이 배에는 군인을 비롯하여
    식민지 세네갈에 정착할 프랑스인들, 세네갈을 통치할
    행정 책임자 등이 타고 있었지요.

    <메두사의 뗏목>은 이 배들이 대서양을 항해하던 도중 발생한 잔혹하고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했습니다.

    보다시피 이 작품에서는 어떠한 질서나 숭고한 도덕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국가에 대한
    봉사와 헌신, 희생을 강조했다면, 이 그림은 봉사한 사람들을
    저버린 국가에 대한 응징 또는 적극적 저항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시대에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강대국들에게 아프리카 식민지를
    경영한다는 것은 막대한 부를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고위관료에게 돈을 주고
    식민지 개척에 참여하기를 원했지요.

    이 작품이 소재로 한 사건의 발단 역시 그 부패와 연관된것으로,
    25년간 배를 탄 적이 없는 퇴역 군인 위그 뒤르와 뒤 쇼마레라는 인물이
    뇌물을 주고 식민지로 향하는 군함의 함장 자리를 샀던 것입니다.

    1816년 7월 2일 오후, 이들의 미숙한 지휘와 무능함으로 인해
    아프리카 해안으로 12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배가 좌초합니다.
    이 배에 타고 있던 4백여명의 인원 중 대부분은 죽고
    149명만이 급조된 뗏목에 올라탑니다.

    함장을 위해 마련한 구명정을 이 뗏목에 밧줄로 묶어 해안까지
    끌고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함장은 뗏목에 연결된 밧줄을 끊어버리고 혼자 도망치고 말지요.

    149명을 태운 뗏목은 15일 동안 바다를 표류하게 됩니다.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이 광기어린 두려움과 고통만이 이들을 지배합니다.

    1816년 7월 11일, 뗏목의 생존자는 열다섯명으로 줄어듭니다.
    뗏목에는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타는 갈증,
    살인, 죽음의 공포만이 난무했을 것입니다.

    어떤 질서의식도,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휴머니즘, 도덕심도 없었겠지요.
    그리고 굶주림에 지친 이들은 동료들의 인육으로 연명합니다.

    1816년 7월 17일, 이들은 같이 출항했던 군함 아르귀스호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됩니다. 구조된 열다섯명중 5명은 곧 사망하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 두려웠던 시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모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은 통해 보도된 뒤 사회적으로
    격렬한 파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을 만들어 낸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지요.
    인간과 사회, 즉 정치가 존재하는 한 부정과 부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몽테스키외의 단언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퇴역군인이 이기심과 사리사욕에 눈먼 정부관료를
    돈으로 매수한 부패상은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황금에 눈 먼 자가 무리하게 배를 지휘하여 배를 좌초시키고,  
    그 결과 4백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죽었습니다.
    이 행위가 무고한 사람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권용준,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 중에서






2007-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