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명화갤러리[명화·신화이야기]

뒤러의 초상화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3. 13:59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 (1490)






그림을 클릭하면 큰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초상화"  





    뒤러는 자화상 외에도 초상화를 남겼다. 그 중에는 부모님을 그린 것도 있는데
    당시 부부 초상화의 전통대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반측면이고 가슴 아래 손까지 그린 것 등이 스승 볼게무트의 영향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부부 초상화를 그려서 자신의 저택에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는데,
    뒤러의 부모는 화가 아들 덕분에 그려져 영원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이들 부부는 뒤러를 포함하여 열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한스와 엔드레스를 포함하여 세 형제만 남고 모두 사망했다고 하니,
    뒤러의 집안에는 출생과 사망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뒤러의 부친은 평생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한 근면한 사람이었다.
    여기서는 모피코트에 모자를 쓰고 있으며 손에는 묵주를 들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1490이라는 작품의 연대와 작가의 모노그램이 그려져 있다.
    연대와 사인은 이후에 써넣은 것이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Portrait of Barbara Durer  (1490)






    아버지와 마주한 어머니는 30세 정도로 추정되며
    당시 독일 여인들이 사용하던 흰색 두건을 착용하고 있다.
    긴 코에 윤곽이 뚜렷한 모습에서 뒤러가 모친을 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 역시 묵주를 들고 있지만 남편의 것에 비하면 아주 작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Durer's Mother  (1514)






    윗 작품이 그려지고 25년 후인 1514년에 뒤러는 또다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번에는 많이 늙은 모습이다. 스케치가 완성되고 몇 달 후 그녀는 사망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목에 주름이 가득한 깡마른 노파의 모습이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꼭 예쁘고 화려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곳도 미화시킨 구석이 없지만 평생을 근면하고 검소하게 산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존경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뒤러는 1504년부터 1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시고 살았다.
    데생 작품은 뒤러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Portrait of Oswalt Krel  (1499)







    또 다른 남자 초상화의 주인공은 뒤러와 동시대인이자 동향인이었던 오스볼트 크렐이다.
    중앙에는 주인공 초상화가 있고 패널의 양족 날개에는 휘장을 든 털북숭이 인간들이 보인다.
    초상화가 단순히 인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Portrait of Oswalt Krel  (1499)







    젊은 오스볼트 뒤에 붉은 천과 풍경이 있다. 이 사람은 뉘른베르크의
    부유한 상인이었다. 부를 과시하려는 듯 모피코트를 강조하고 있으며,
    검은 옷과 앞이 깊이 파인 흰색 블라우스가 대비를 이룬다.
    손에 낀 반지도 그의 지위를 짐작케 한다. 주인공은 비스듬히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무언가에 놀라기라도 한 듯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베니치아에서는 성모님 뒤에 푸른색 천을 늘어뜨리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 인물의 배경에 쓰인 붉은 천도 베네치아 성화의 영향인 듯하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Portrait of Michael Wolgemut(1516)







    뒤러의 초상화는 1515년경 다시 한 번 변화를 겪는다.
    가장 독일적이고 가장 뒤러적인 특성으로 돌아갔는데 <미카엘 볼게무트>는
    이 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초록을 배경으로 한
    스승 볼게무트의 모습에서는 한 노인의 내면이 절절히 묻어나는 듯하다.
    노화된 피부와 암시적으로만 그려진 모피는 뒤러가 정교한 붓질 없이도
    얼마든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근 것이 절제되어 잇지만 스승의 빛나는 눈에서 여전히 강인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고흐가 뒤러의 시대에 살았다면
    아마도 이렇게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면서도 평화로운 노인의 모슴은 경지에 다다른
    대가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의 오른쪽 여백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알프레히트 뒤러가 1516년 스승 미카엘 볼게무트의 초상화를 그리다.”

    이 그림이 제작되고 3년 후인 1519년 볼게무트가 세상을 떠나자 뒤러는 다시
    “그는 82년을 살았으며 1519년가지 살다가 해가 뜨기 전 성 안나의 날에 세상을 하직했다.”
    라는
    문장을 추가로 삽입했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Portrait of Emperor Maximillian I (1519)






    1512년 2월 4일부터 4월 21일까지 뉘른베르크에 있는 동안 뒤러는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고용되어, 1519년까지 주로 황제를 위하여
    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독일 미술가 몇 명과
    공동으로 황제의 기도서 가장자리에 소묘를 그려 넣었다.

    뒤러가 황제와 개인적인 교분을 맺으면서 나온 최고의 기념비적 작품은
    1518년 아욱스부르크 에서 제국회의가 열릴 때 그린 온화하고
    재기 넘치는 <황제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을 보면,
    뒤러가 1510년대 말기로 가면서 점차 피곤에 빠졌다는
    누차 제기된 견해에 대해 우리가 신중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물론 그가 당시 곳곳의 작품에서 무미건조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색감도 차갑고 조화되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세밀히 그린 그림들이
    구태의연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장식 미술가로서 미래를 약속하는 폭넓고 깊이 있는
    취향 속으로 힘차게 몰입하고 있다. 비록 그의 회화가 전체적으로는
    고심의 흔적을 보이고 있으나, 그래도 내밀한 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미슬 양식을 집약해 줄 폭넓은 관찰이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다.
    단지 문제는 형식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데 있어서
    그의 자연스런 감각으로 충분한가 하는 점이었다.

    뒤러는 이탈리아나 플랑드르보다 뒤늦게 초상화를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일 초상화를 그 어느 지역 못지 않은 독보적인 것으로 발전시켰다.
    스케치, 유화, 템페라화, 판화를 막론한 다양한 재료와 테크닉으로 초상화를
    제작함으로써 표현의 영역을 확대해갔다. 그는 초상화를 종교화와 어깨를
    겨루는 장르로 승격시켰으며 이후 북유럽의 초상화는
    뒤러의 작품 없이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계속"


 

 

2006-03-17

'갤러리 > 명화갤러리[명화·신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러의 동판화  (0) 2008.11.13
뒤러의 목판화  (0) 2008.11.13
뒤러의 자화상   (0) 2008.11.13
뒤러의 기도하는 손  (0) 2008.11.13
스펜서-패트리샤 프리스와 함께 있는자화상   (0) 200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