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Self-Portrait at 13 Years Old(1484)
르네상스 시대의 대학자 에라스무스는 동시대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에
대해 극찬하는 글을 남겼다. 뒤러가 고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아펠레스(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화가로 현존하는 작품은 없으나
고대 문필가들의 예찬으로 그의 재능과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이다.
아펠레스는 사물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필요로 했지만,
뒤러는 도화지 위에 그려진 선만으로도 빛과 그늘, 입체감과 깊이감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뒤러는 유럽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15,16세기의 전환기에 살았다.
독일로 이민온 금속 장인의 헝가리 2세 출신으로 정신적인 면에서는
일찍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접하고
학식을 쌓은 선진적인 사고의 지성이었으며
미술면에서는 북이탈리아에서 만난 만테냐와 벨리니로 부터
영향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이상적인 미술가의 전형으로 본받았다.
뒤러는 어린 시절 부터 스스로의 천재성을 자각하고 13세의 나이에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의 창시자 이기도 하다.
뒤러는 북부유럽 최초의국제 미술가, 서양 미술 최초의
적극적인 자기 PR가, 현란한 아이디어 맨이자 환상적인 상상가로 일컬어 진다.
지금 그의 판화에 일일이 새겨져 있는 AD 모노그램(화가의 이름 첫글자인
A 와 D를 따서 결합하여 만든 글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상표(TRADE MARK) 나 로고(LOGO)와 그 개념이 통하는 데가 많다.
그는 자신의 AD 모노그램이 무단 복제로 남용 될 것을 우려해 법정에
저작권 보호르 요청하기도 한 저작권 법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판화들을 일반 대중을 상대로
시장에 내다 팔 정도로 대량 인쇄했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Self-Portrait (1491)
그가 열 아홉살에 그린 이 자화상으로 찡그린 눈과 근심 어린 입모양은
작가로서 걸음을 내딪기 시작한 이 소년이 느끼는
불안감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확실성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Self-Portrait (1493)
22살이 된 뒤러는 아버지가 짝지워 주신 자신의 약혼녀에게 보낼 자화상을 그린다.
오호. 그는 넘치는 끼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곱슬거리는 머리결,
술이 달린 빨간 모자에 살짝 드러낸 야릇한 어깨는 그의 긴 목을 강조하고,
무엇보다 강렬한 눈빛 공격이 인상적이다.
뒤러가 한손에 들고 있는 식물은 남자의 정절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엄숙한 자세,
그리스도와 닮은 이상화된 용모를 보여주면서,
여느 통속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권위와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화면 왼쪽에서 쏟아지는 빛의 음영은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비튼
뒤러의 어깨를 밝게 채색한다. 바로 후기 고딕 양식의 전통을
그대로 북부 독일로 전해준 기법이 이 작품에서도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1490년부터 94년 사이에 뒤러는 독일과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 중에 세 점의 자화상을 제작했다. 그 중 세 번째 초상화는
캔버스에 그린 것으로 금발의 긴 머리에 잘 생긴 젊은이로
당시 유행하던 복장을 한 그림이다.
중성적인 외모와 꽃을 든 포즈, 약간은 긴장된 얼굴 표정 등은
혼인 서약의 신성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약혼녀에게 보여줄 그림을 하나 보내라는 부모님의 요
청에 따라서 여행 중에 스트라부르에서 그려서 고향으로 보낸 것이다.
그림 위쪽에는 1493년이라는 연대와
“나의 일은 위에서 정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글이 보인다. 이는 부모가 정한 결혼을 따라야 하는 심경을
나타낸 것으로 뒤러는 사랑의 행운이나 행복한 결혼을
상징하는 에링기움이라는 풀을 들고 있다.
1494년 긴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러는
그해 7월 7일 아그네스 프레이와 혼인한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Self-Portrait (1498)
"화가도 귀족처럼 고결하다"
이번에는 신사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화가가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제작한 것이다. 아마도 뒤러는 인문주의가 활짝 핀 르네상스의
본고장에서 예술가의 지위 상승에 대해 통감했던 것 같다.
뒤러는 이 작품에서 반측면인 긴 금발의 곱슬머리를 어깨까지 멋스럽게 내리고,
손질이 잘 된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으며 흰색 바탕에 검정으로 포인트를 준
현대적인 의상에 하얀 장갑까지 끼고 있다. 바로 귀족 청년의 모습이다.
의상의 앞부분에는 겉옷을 고정시키기 위해 흰색과 푸른색의 실을
꼬아서 만든 줄이 보이는데 의상의 색상과 잘 어울린다.
손에 장갑을 낀 것은 귀족적인 풍모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15세기 중반까지 당시 사람들이 입던 위상은 서로 비슷했다고 한다.
15세기 말이 되면서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는 의상이 등장했다.
뒤러는 자신의 달라진 위상을 이 자화상을 통해 자랑스럽게 알리려는 듯하다.
창문 너머에 풍경을 그리던 방식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 크게 유행한 것이다.
창틀 바로 아래 뒤러의 모노그램과 글자가 보인다.
“1498 나는 여기에 스물 여섯 살의 내 모습을 그렸다. 알프레히트 뒤러.”
뒤러 특유의 대문자 A안에 D가 잇는 모노그램은 이 무렵부터 등장한다.
모노그램이란 바로 이 즈음 독일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두 개 이상의 문자를 조합하여 형상을 만드는 것인데 화가들은
모노그램을 사인처럼 사용했다.
뒤러는 대부분의 작품에 모노그램으로 서명을 했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Self-Portrait in a Fur Coat(1500)
"화가는 신이다"
뒤러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자화상에서 스스로를 예수님처럼 그렸다.
마치 그리스도의 이콘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구원자 예수>와 비교해 보면
놀랄 만큼 유사점이 많다. 가슴까지 그린 정면의 형상,
손의 모양, 글자의 삽입, 검은 배경 등이 그것이다.
메시나의 그리스도는 축성을 내리는 손인데 반해
뒤러는 자신의 옷을 만지는 사실적인 모습이다.
뒤러가 메시나의 이 작품을 직접 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뒤러가 1495년에서 96년 사이에 베네치아를 여행하고 왔으니
짧은 기간 그곳에서 활동한 메시나의 작품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화상은 거울을 보고 그린 측면의 모습이었는데
여기서는 왜 이콘의 예수님 형상처럼 정면으로 그렸을까?
파노프스키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는 예술가의 창의적인 능력이
창조자이신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와 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이 탄생한 것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이다. 그림 오른쪽 여백에는
“1500년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 되던 해에
나 자신을 영원히 변치 않는 색상으로 그렸다.”라는 내용이 씌어 있다.
[그림]Albrecht Duerer (獨,1471-1528)◈ Self-Portrait in a Fur Coat detail
이 작품이 제작된 1500년은 그리스도교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희년이다.
희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데 가톨릭에서는 희년이 되면
자신의 죄를 사함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1500년을 성스러운 해로 정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희년에 면죄받기 위해 로마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던 해에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렸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천재성을 뛰어넘어
자신의 능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혹은 자신이 바로 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 이후에 뒤러는 더 이상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하기야 자신의 모습을 신의 모습처럼 그리고 나서
어떤 다른 모습으로 더 그릴 수 있겠는가.
뒤러는 1528년 4월 6일, 57세가 채 못 되어 사망했다.
불규칙한 네델란드 여행 때문에 생긴 질병이 수 년 동안 그의 기력을
약화시키고 외양도 망가뜨리다가 이제 그를 데려간 것이다.
그가 생의 말기에 그린 자화상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만년의 초상화는 젊은 시절에 그린 수많은 자화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뒤러의 모습은 뮌헨 미술관에 있는,
이상화되어 그려진 바로 이그림이다. 실물과 닮지는 않았지만
그의 본질적인 성품이 모두 담겨 드러나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이다.
" 사상가 같은 이마를 갖춘 위엄 있는 얼굴, 풍부한 감성이 엿보이지만
의미심장하고 지적인 흐름이 느껴지는 입술,
관조적이기보다는 관찰하는 듯한 눈이 그렇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