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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계룡산 여행기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9. 09:48

 

 

"나뭇잎 같은 사람 많다" 도종환 글 최영주 곡.노래
 
 

2005년 10월 26일(수)

어머님께서 지인이 창건한 절(계룡산 보광원)에 소불을 봉안해 놓았으니, 둘째 딸내미가 수능을 앞두고 있으니 불공도 드릴겸 다녀 오라는 지엄(?)한 명이 떨어진 지 며칠되었다.

어제도 엄니로 부터 전화를 받은 집사람이 회사 하루 쉬고 다녀오자고 보챈다.

명을 수행하고 빨리 보고를 드려야 한다나 ㅋㅋㅋ

이왕 먼 길 가는데 그냥 갈 수 없음이니,그것도 명산중의 하나인 계룡산임에야~

하여 계룡산을 한 바퀴돌며 삼사순례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동학사는 여러차례 가본터라 초행길인 갑사와 신원사를 탐방하여 보광원에 가는 것으로 이정표를 정하고 올라 갈 때는 경부고속도로로, 내려 올 �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기로 하였다.

 

계룡산
 
 계룡산은 대전시, 공주시,논산시의 3개 시에 걸쳐있는 충남 제일의 명산으로 차령산맥과 노령산맥의 사이에 이룩된 산지로서 기복을 이룬 능선이 마치 닭벼슬을 쓴 용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계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룡산의 최고봉은 845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의 모습이 수려하고 수석이 풍부하여 이미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알려졌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 5대 명산 중의 하나인 서악으로 지칭되었으며, 풍수가들은 이 산의 지리를 해룡고조 (산의 지맥이 빙 돌아서 본 산과 맞서는 형국)의 형세, 혹은 산태극, 수태극의 형세로 보고 매우 진기하게 여겼다.

이처럼 산세가 특이해서인지 계룡산에는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계룡산의 동서남북에는 사대 사찰이 있는데 동쪽의 동학사, 서쪽의 갑사, 남쪽의 신원사는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있으나 북쪽의 구룡사는 절터만 남아 있다. 계룡산의 남쪽인 논산군 두마면 용동리 부남리 일대에는 이른바 신도안이라는 특이한 지역이 있는데- 지금은 육,해,공 3군 본부가 들어서 있음-이곳은 조선의 이태조가 1393년 2월부터 1년간 새 도읍의 건설을 진행시켰다가 교통의 불편 등을 이유로 결국에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말았지만, 소박한 이 곳 사람들은 계룡산에서의 새 도읍 건설을 중단한 것은 "이곳이 정씨의 땅이니 여기에 도읍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고믿고 있다. 지금도 당시 궁궐 건축에 쓰려 했던 커다란 주춧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곳에는 각종 유사종교들이 붐비고 있는데 그 원인은 정감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계룡산 서북쪽 기슭 해묵은 노송과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 갑사는 봄엔 동학사 , 가을엔 갑사 라는 말이 있듯이 가을 단풍을 한껏 자랑한다.고구려의 구이신왕 원년(420년)고승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고 귀국길에 계룡산을 지나다가 이 곳 배석대에 주춧돌을 놓았다는 설화가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사적원지 인 대숙전 천불전 등 10여채의 건물들이 있고 부도와 당간지주 월인석보판본 등 귀중한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화엄종 10대사찰의 하나이기도 한 갑사는 5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백제시대의 석조보살입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갑사강당아래에서.

돌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이 나온다.

 

 

▷나가는 길에 그냥 좋아 보여서 ^^

 

당간이란 당(괘불)을 달아두는 장대로서 이 당간을 세우기 위해 양쪽에 지탱하는 지주를 세우고 그 중간에 당간을 세우는데 우리나라의 당간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무너지고 파손되어 남아 있는 것이 극히 적고 대부분은 양쪽의 지주만 남아있어현재 남아있는 당간으로는 청주 용두사터의 철당간과 나주 동문밖 석당간 그리고 갑사의 철당간 정도로 이 철당간은 용두사터것보다앞선 통일신라 때 것으로 여겨지고 제 자리에 놓여 있으므로 갑사의 위치추정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갑사로 가기 전 우측길로 400여미터쯤 가면 철당간지주가 나온다

 

 
 갑사괴목

 

▷갑사주차장근처에 있는 괴목

 

갑사 괴목대신제의 유래

갑사동 용천교 입구에 수령이 1600여년이 넘은 괴목(느티나무)이있다. 갑사의 창건과 역사를 같이 한 이 괴목은임진왜란 때에는 영규대사와 많은 승병들이 모여 그 그늘 밑에서 작전을 세우기도 한 호국불교를 증거 하는 신수(神樹)이다.

300여년 전 갑사 작명등(호롱불과 유사) 기름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를 이상이 여기신 스님들은 어느날 밤에 작명등 기름이 없어지는 이유를 밝히고자 몰래 밤에 장명등을 지키기시작하였는데, 덩치가 큰 누군가가 기름을 훔쳐 가는 것이었다.

놀란 스님들은 당장 그 물체를 찾아가니 바로 이 괴목의 당산신이었다. 기름을 훔쳐간 연유를 묻자 당산신은 사람들이 담뱃불로 이 나무의 뿌리에 상처를 내었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갑사의 작명등기름을 가져가 발랐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를 알게 된 스님들은 마을 사람들과 괴목의 주위를 잘 정리하였다.

그후 갑사의 작명등 기름이 없어지지않았으며, 마을에 돌았던 역병이 없어져 스님과 마을 주민들은 괴목의 당산신에게 매년 정월 초사흗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자료 제공: 계룡산 갑사)

 

 신원사

갑사에서 신원사로 가는 길 여기 저기에 굿당이 많이 눈에 띄었다. 무속인이 그만큼 이곳 계룡산에 많은 까닭이리라.

 

신원사는 공주에서남쪽으로 50리 계룡산 연천봉 남쪽 기슭에 있는 백제의 고찰로 의자왕11년 (651년)에 보덕화상이 창건한 것이라 알려져 있고 최근경내에서 백제 때 연꽃무늬의 기와가출토되기도 했는데 창건이후 여러번의 중건 중수를 거쳐 대가람으로 위용을 잘해오던 이 신원사는 지난 1981년부터 다시 대웅전 보수등 사찰의모습을 일신하는 대규모의 중건사업이 진행중에 있다. 이 신원사는 이 성계가 자신이 꾼 꿈을 임금이 될 꿈이라 풀이해준 "팥거리 할머니"를 천기가 누설될까봐 죽였는데 임금이 된 뒤에 이 할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고 해서 옛 이름이 신원사였고 그 할미는 계룡산의 산신이 되어 대바위라 불리는 상봉에 살면서계룡산을 다스린다고도 한다. 신원사에는 대웅전과 독성각 명부전을 비롯 여러선방들이 있는 외에도 계룡산의 산신에게 제사드리는제단인 중악단이 있어 눈길을 끌고 이 밖에도 신원사에는 지방유형문화재(31호)인 5층석탑과 8기의 부도등 여러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신원사입구.우측 등산로를 따라 600여미터쯤 올라가면 보광원이 나온다.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는 길이 여느 절과는 다르다.

 

▷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신원사경내. 널따란 잔디밭이 마치 고궁같다.

 

 

 중악단

본래는 계룡산 산신제단 즉 계룡단이던 것이 조선조 고종때에 묘향산에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 을 두고 이들과 함께 중악단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더우기 중악단의 건물양식은 다포팔작의 조선시대 말기의 빼어난 건축물로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안고 있다.국내에서 제일 큰 산신각인 중악단은 명성왕후도 이곳에서 구국과 국태민안을 서원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안에는 계룡산신의 위패를모셔 놓았으며 지붕에 12지신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산신각인 중악단앞에서


 

신원사 벽암당 진신사리를 친견하고

벽암당 동일대종사 연꽃사리

지난 5월 6일 충남 공주 신원사(주지 지성 스님)에서 입적한 벽암(碧岩) 스님의 몸에서 연꽃 모양의 사리가 수습돼 화제를 모았었다. 하여 이번에진신사리를 친견할 기회를 가졌다.

▷신원사 총무 견진 스님은 지난 5월 11일

“큰스님의 다비장 후 정골(정수리뼈)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연꽃 모양의 사리가 발견됐다”며 사진을 공개했다.


지난 5월 6일 입적한 명예원로의원 벽암당(碧岩堂) 동일(東日)대종사는 조계종단의굵직한 소임을 두루 맡으며 불교발전에 힘썼고, 선객으로써도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이 시대 몇 안 되는 스승중의 스승이었다. 대종사의 이러한 올곧은 정신은 입적하던 그 날까지도 계속됐다고 한다.

입적하던 날, 스님은 미리 죽음을 예견한 듯 제자들을 불러놓고 선(禪)문답을 나누며 편안한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무적벽수(無滴碧水)가 장강(長江)을 이루고 대해(大海)를 고갈(枯渴)시키느니라”고 답하며 삶의 무상함을 설하고 삶이 결코 죽음과 둘이 아님을 밝혔다. 스님은 또 다른 제자가 “제불조사(諸佛祖師)의 의지는 무엇이며 공부는어떻게지어가야 합니까”라고 묻는 질문에도 “아침에 죽이오, 사시에마지 올리고 저녁은 없느니라”라고 답하며 “잘 달래주고 기운내어 정신차려 절도 있게 살펴가며 살아가야 옳으니라”고 격려했다. 이어 도리를 묻는 질문에 “박수미회(拍手未會)에 작창가(作唱歌)니라(박수도치기 전에 노래부르는 것이니라)”고 덧붙이며 질책하는 것도 아끼지 않았다.

 

사리가 안치된 '벽수선원'에 들어 서니 입적하시기 전 벽암스님이액자속에서 애기처럼 해맑게 웃고 계신다. 녹두알만한 진신사리도 그렇거니와 사진속의 하얀 사리가 마치 연꽃이 핀 것처럼 경이로웠다. " 나무아미타불~"

 

신원사를 빠져나와 우측 등산로를 따라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보광원을 찾았다.

가파른 길은 아니지만 여전히 오른쪽 무릎이 아픈 상태라 징징거리며 집사람에게 어린냥을

부려 본다. " 내 좀 업고 가지~ "ㅋㅋㅋ . 계룡대의 군인 들인 듯 츄리닝차림으로 무리지어

내려 온다.

 

 소불을 봉안한 보광원을 찾아서
신원사를 나와 우측 등산로를 따라 600여 미터쯤 올라가니 '보광원'이 나온다.어머니와 지인이신 분이 창건한절이다. 이곳에 자식들의 안녕을 비는 어머님의 염원이 담긴 소불이 봉안되어 있다.

자식들 잘 되기만을 비는 어머님의 바램에 마음이 무겁다...

예불을 올리고 가까이 가보니 명판의 이름이 틀려져 있다.

에고~ 그래서 내 일이 잘 안풀렸나? ㅋㅋㅋ

법당을 나와 절에 계신 보살께 수정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하산하였다.이제 진주쪽으로 내려가면서 덕유산 지리산 단풍이나 구경해 볼까나~ 아~ 다리도 아프고~ 피곤도 하고~ 갈 길은 멀고~ 흐~(終)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둘째고모네 식구

(데이비드-고모-셀비)


 

▷동생과 나 (모두 이름 끝자가 誤字였다)

 

 

나뭇잎 같은 사람 많다


도종환 글
최영주 곡.노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세상에는 나뭇잎 같은 사람 많다 사람 많다
뜨거운 햇살을 제일 먼저 맞고 비가 오면 차가운 빗발을 세찬 바람에
제일 많이 시달리는 것도 나뭇잎이다
벌과 나비가 나무를 찾는 것은 꽃이 피었을 때이다
새나 짐승이 나무를 찾는 것은 열매가 열렸을 때이다
뿌리는 나무를 튼튼히 받치고 있다해서 칭찬하지만 나뭇잎은
그런 칭찬조차 듣지못한다
꽃이 피었을 때처럼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의 발길을 붙잡지도 않고
열매 맺었을 때처럼 대견하단 소리조차 들어본 적도 없다
봄에서 가을까지 나무와 함께 있는 동안
짙은 향기를 내 뿜으며 고고해 본 적도 없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는 뻐기듯
어깨를 젖히고 서 있어 보지도 못한 나뭇잎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동안 그저 저 혼자 푸르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세상에는 나뭇잎 같은 사람 많다 사람 많다
눈에 뜨이는 화려함이나 특별한 빛깔도 없는
그런 나뭇잎이 모여 나무를 만든다
평범한 잎들이 가장 오랫동안 나무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으며
기쁨과 고난과 시련을 같이한다
꽃은 잠깐 있으면서 나무가 받을 명예로운 이름을 제가 다 가져가지만
나뭇잎은 꽃없는 나머지 날들을 말없이 지키면서
명예와는 거리가 먼 삶을 푸르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세상에는 나뭇잎 같은 사람 많다 사람 많다
보잘것없는 이파리 같은 사람들 모여 세상을 이룬다 세상을 만든다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동안 그저 저 혼자 푸르게
이세상 사는 동안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피할 그늘을 만드는 나뭇잎들 모여 숲을 이룬다
눈에 뜨이는 화려함이나 돋보이는 빛깔도 없는
그런 나뭇잎 같은 사람들 모여 세상을 만든다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동안 그저 저 혼자 푸르게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동안 그저 저 혼자 푸르게



200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