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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이카루스 -3/3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6. 10:03


[그림]Pieter Bruegel the Elder(Flemish,1525-69)◈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1558)





그림을 클릭하면 큰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브뤼겔의 이카로스 추락이 있는 풍경에 대한
    최영미님  김 진엽(홍익대 예술학과 )교수와 박홍규님의 감상평을 소개합니다.



    최영미/시대의 우울중


    농부가 쟁기를 끌고, 양치기가 양떼를 돌보다 잠시 쉬고
    어부가 낚시를 하는 한가로운 풍경.
    바다에는 범선이 떠 있고 멀리 수평선 너머 태양이 빛난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은 엉뚱하게도 <이카로스의 추락>이라고 붙어 있다.
    이카로스(icaros)라면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미궁을 탈출하다
    태양에 가까이 가는 바람에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하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다.

    도대체 어디 숨었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한 소년이 사라진 자취가
    가뭇없다. 이까로스를 식별할 수 있는 얼굴이라든가 하다못해
    날개의 한쪽도 보이지 않는다. 숨은 그림을 찾듯 샅샅이
    캔버스를 뒤진 뒤에야 겨우 그 몸의 일부를 발견했다.

    오른쪽 하단에 수면 위로 삐죽 솟은 것이 발버둥치는 인간의 다리 같다.
    그런데 중앙에 우뚝 선 농부의
    두드러진 전신상에 비해 손톱만큼 죄그맣게 그려진데다,
    브뤼겔이 즐겨 구사한 교묘한 대각선 구성으로 말미암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바다와 육지를 나눈 대각선의 안쪽에서
    관람자의 시선은 선명한 붉은색의 옷을 입은 농부에게 집중되어,
    쟁기를 끄는 그의 진행 방향에 따라 화면의 왼쪽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오른쪽 구석에 처박힌 이카로스의 두 다리가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
    소년이 추락한 장소가 신화 속에서처럼 지중해가 아니라
    화가가 살았던 플랑드르 지방의 바다, 죽 북해의
    시원한 풍광에 가깝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 광활한 푸른 물결에 파묻힌 이카로스는
    가느다란 갈색의 막대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높이 날다
    태양에 감히 접근했던 이까로스는 자신의 과욕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 인간의 예기치 못한 재난 앞에서
    세상은 정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평화롭기 그지없다.
    오든의 시처럼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바다는 그대로 푸르다.
    농부, 양치기, 어부---전경에 등장하는 이 세 인물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은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를,
    살려달라는 외침을 들었으련만......
    태평스럽게 자기 일에만 몰두 할 따름이다.

    낚사꾼은 바로 코앞에서 소년이 익사하는데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까로스처럼 제아무리 특별한 인물일지라도 개인의 운명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세계.그 끔찍한 리얼리티를,
    도저한 허무를 이처럼 딴청 피우듯 유유자적 표현한 화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인 브뤼겔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1551년에 안트워프의 길드에 장인으로 등록된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장인이 된 뒤에 그는 약 2 년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다녀온 대부분의 북유럽 화가들과 달리
    그는 고전미술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농민을 주로 그려 ‘농민브뤼겔이란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브뤼겔은 교양이 풍부한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브뤼쎌에서 ’사랑의 가족‘이라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써클과 연루되었다고 한다. 이 그룹은 1560년대 네덜란드를 분열시켰던
    종교분쟁에 직면하여 ’중용‘과 온건한 조화를 옹호했다.

    중용이니 조화니 하는 것들이 불온하게 간주되었으니.
    16세기 북유럽에서 신 구교간의 갈등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그 혼란스런 사회상이 가히 짐작된다.
    그는 이도 저도 아닌 중간노선이 오히려 급진적이던
    광기의 시대를 살았던 모양이다. 그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그가 남긴 작품의 대부분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가
    주를 이룬다. 단순 투박한 선과 원형 볼륨 등 그이 회화 기법은
    일견 윈시적이고 순박해 보이나 사물의 이면을 꿰뚫는 통찰력은
    누구보다도 날카롭다.

    그는 옛이야기를 안일하게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당대 플랑드르의 범속한 풍경 속에 집어넣어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해냈다.
    사실을 넘어선 진실의 탐구, 바로 그 고통스런 자기인식이었다.





    김 진엽


    16세기에 활동했던 화가 브뤼겔의 작품 한 점.
    해안 지역이다.
    몇 척의 범선이 눈에 띄고 저 멀리로 항구의 모습이 보인다.
    육지에서는 밭을 가는 농부와 양을 치는 목동의 모습이 한가롭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브뤼겔의 고국이었던 네덜란드의 풍경인가?
    그림의 제목을 찾는다.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그렇다면 이 그림은 이카로스가 추락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그림일 터이다.
    이카로스는 어디 있을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단서를 찾기 위해 이카로스에 얽힌 그리스 신화를 되짚어 보자.

    이카로스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붙여
    날개를 만든 후 미궁에서 탈출했다.
    욕심을 내어 너무 높이 날아오르다 태양 빛에
    밀랍이 녹아 결국 바다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림 속의 바다 위를 뒤져보자.
    그림 오른쪽 아래편의 바다 한 쪽에 무엇인가 잠겨 있다.
    자세히 보니 발바닥과 종아리가 보인다.
    이카로스가 바다에 추락해 몸은 다 잠기고 발의 일부만 남았다.

    이상하다.
    왜 브뤼겔의 그림에서 이카로스의 모습이 최소화돼 있을까?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카로스라는 인물이 실제로 바다에 추락했다고 할 때,
    일반인들에게 그의 추락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널따란 바다에 모래알 같은 한 점으로 떨어지는 그의 추락을
    일반인은 대부분 눈치조차 챌 수 없으며,
    직접 목격한다고 해도 한 생명의 죽음이 안타까울 뿐이지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밭을 갈고 양을 돌보며
    자신들의 생업을 이어나간다.

    왕족과 영웅의 역사가 아닌 일반인의 역사를 담는 데
    열중했다는 것이 브뤼겔의 작품 경향에 대한 일반적 평가며,
    이 그림도 그런 경향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에서 그는
    이카로스를 최소화함으로써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 그림의 주인공,
    나아가 역사의 주인공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카로스에 얽힌 그림은 이카로스를 최소화함으로써
    작가의 예술적 메시지를 최대화했다.

    요즈음 테러를 통해, 또는 그 테러에 대한 전쟁을 통해
    선전 효과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작지만 분명한 목적 의식을 지닌 목소리가
    더 큰 효용력을 지닐 수 있음을 위의 그림은 실증해 준다.




    박홍규의 문화 이야기중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유일한 신화의 주인공 이카로스는 흔히
    지식의 경계를 넓힌 탐구자로 찬양되나, 브뢰겔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카로스를 화면 구석에 작게 그려 그를 비웃고 있다.

    지식에 대한 과도한 물신화를 비판적으로 본 것이다.
    대신 화면의 전면에 묵묵히 일하는 농부를 크게 배치해 그를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 역시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당대 휴머니스트들이 자연과 농민을
    찬양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브뢰겔의 농부는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는 실존이다.



이카로스 비가(悲歌)



                         김규동



낙하하지 않고는 심연을 알 수 없다
그때 비로소 의식은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단애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죽은 말소리와
끈질긴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한 자루 연필이나 짐짝처럼 구르며
임리한 물질인 스스로를 키워간다

어찌 코와 눈과 팔다리의 움직임만으로
뜨겁다든가 차다든가 하는
저 흐름의 흔적만으로
멸하여가는 것을 증명한다 할 수 있을까

있다는 것만으로 물질은 거기 보이고
우리의 오늘과 내일은 사라진다
우선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고통스런 반복과 뭉개진 인정 사이에서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단애에 울리는 파도 소리는 어둡고 차다

모순의 안과 밖에 흩어지는 언어
머리를 풀어헤친 수목의 그늘이
쓰러진 생활의 잔해에
옛날처럼 따스한 속삭임의 몸짓을 보내나
지평선을 달리는 경직된 이성이
슬픔의 중심을 알 까닭이 없다
하여
산다는 것은 더욱 갇힌다는 것이고
어디를 바라봐도
약속처럼 매여 있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말의 집적에 눌려
타인같이 어두운 거울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꿔본다는 것이다

고독은 때로 관능적인 것이기도 하기에
물질과 물질이 부딪는 사소한 소음에도
이처럼 살벌한 꿈을 꾸게 되나 보다
이카로스여 날개여

그대와 우리 사이에 교감하는
이 흔들림의 선율은 무엇인가
가슴에 파고드는 이 침묵의 뜻은 무엇인가.


"끝"
 

 

200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