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여행의 추억/국내여행·마실

[2007년 1월] 경주 동남산 서출지-칠불암

인생멘토장인규 2007. 1. 23. 15:11

여행지

경주 동남산 칠불암 마애불상

여행기간

2007.1.2(화)

나의 평가

별로네요

)

별로네요

)

별로네요

)

별로네요

)

별로네요

나의 여행 스토리

신년 년휴. 애들은 친구들이랑 놀러가고 없고, 집사람이랑 지난번에 이어 또 다시 경주

동남산을 찾았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찾았는 지라 이번 코스는 칠불암까지.

통일전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서출지와 남산리 삼층쌍탑을 지나 칠불암까지 가는 길은

간간히 등산하는 이외엔 고즈넉하다.

▣ 서출지(書出池) 史蹟 138 號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공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남산리 사지 쌍탑(慶州南山里三層石塔) 寶物 124 號

남산동 양피못 서쪽의 폐사지에 서있는 동서삼층석탑은 양식을 달리하면서 동서에 대립하는 특수한 쌍탑이다. 현재 금당지로 추정되는 곳은 사유지인 까닭에 주민에 의해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주변의 건물지 역시 민가와 전답으로 매몰되어 있다. 아직 발굴을 시행하지 않아 정확한 가람의 규모나 각 건물들의 배치상태는 확인되고 있지 않으며 동서탑은 해체된바 있다.

동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양식과는 달리 모전석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서삼층석탑은 2층 기단위에 3층의 탑신부를 세운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석탑으로 상부의 노반 이상은 결실되었다.하층기단은 하대저석(下臺底石)과 중석을 같은 돌 4매로써 구성하였으며 하대갑석 역시 4매석으로써 윗면에 상층기단 중석의 받침굄을 표현하였다. 상층기단의 중석은 4매석으로 구성되어 중간은 탱주 1주로서 구획되어 각면 2구씩 도합 8구의 팔부중(八部衆)을 부조(浮彫)로써 나타내었다. 석탑외호의 의미를 지닌 팔부중은 주로 신라 중대이후에 등장하는 드문 조각으로써 이 석탑의 연대와 함께 팔부중조각의 양식계보 설정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팔부중상은 상층기단 면석에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남면엔 건달바와 아수라상이, 동면에는 가루라와 용왕이, 북면에는 긴나라와 마후라가, 서면에는 천과 야차상이 새겨져 있다.

폐사지의 정확한 절 이름은 알 길이 없으나 『新增東國輿地勝覽』경주부의 南山寺또는 『三國遺事』의 남산 동쪽의 양피사(讓避寺)등의 이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칠불암 마애불상군(慶州南山七佛庵磨崖石佛) 寶物 200 號

봉화골은 동남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인데 남산 불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솜씨가 뛰어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있어 유명한 계곡이다. 신라시대 유적으로 일곱 불상이 남아 있는 곳에 근래에 와서 한 암자를 지었으므로 칠불암이라 부르고 있는데, 신라 때 절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 곳에서 발견되는 힘차면서도 화려한 기와무늬며 귀인들이 기도 드리고 중병을 고쳤다는 비석조각들로 보아 이 곳에 나라에서 운영하던 큰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파른 산비탈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m 가량되는 돌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四方佛)을 모셨으며, 1.74m의 간격을 두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불(三尊佛)을 새겼다.
삼존불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에는 협시보살입상을 배치하였다. 화려한 연꽃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크기가 같으며,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삼존불 모두 당당한 체구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다른 바위 4면에 새긴 사방불도 화사하게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원래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이곳 주변에서 당시의 구조물을 짐작케 하는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조각기법 및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칠불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https://t1.daumcdn.net/blogfile/fs11/19_blog_2008_10_22_13_48_48feb0a8e479f)<_code><_p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