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유/사색의 공간[감동·좋은글]

담배있나...

인생멘토장인규 2009. 5. 27. 10:44

 


    
 담배 있나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에 부쳐

 

 
그는 물었다
담배 가진 건 없습니다...가져올까요
경호원이 대답하자
아니 가져올 필요는 없어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잠깐 뒤 그는 다시 말했다
저기 사람들이 지나가네
 
부엉이 바위가 잠깐 울었다
계란처럼 깨진 생이
바위 아래로
잠깐 날아가다 앉았다
 
숨을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유서를 써놓고 올라온 산
이승의 벼랑에서
 
고치고 다시 다지고
다시 고친 결심들이 목 뒤의 옷깃처럼
자꾸 스쳤을 것이다 그는 돌아다 보았다.
형장에 선 사람처럼 담배를 찾았다.
 
고향에 마악 내려갔던 그가
찍어보낸  근황은
슈퍼에서 담배피는 모습이었다
시골 아저씨가 되어
삐딱하게 담배를 무는 여유에는
이제 온전히 스스로의 삶을 누리는 듯한
숨돌리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오래전 야심만만한 의원 시절에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과 나눠 피웠던 담배는
스스로의 열정에 들떠
맛을 느낄 겨를이 없었지만
한 바탕 돌아와보니
이건 참 맛있는 삶이었다
 
귀향의 그곳에서 다시
조금 더 먼 곳으로
영원한 귀향을 하는 그 아침에
그는 담배를 물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가져오라 하지는 않았다
그건 다만 잠깐 필요한 것이지
그것에 의지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인생이 꼭 맛있을 필요 있는가
가면 모두 담배 연기 한 올이다
무너질 육신에 미안해하며
영혼을 구름결에 흩어 미리 망명시키고 싶은
망국의 군주처럼
달디단 한 모금이 잠깐 땡겼을 뿐
 
사람들이 지나가네,
동행의 주의를 돌리고자 함이었지만
사람들은 진짜 지나간다
지나가는 건 모든 사람들이다
지나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는 그 생을 지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혹은 쓸쓸히
바위 아래를 지나갈 것이다
 
담배 있나
부엉이 바위에 섰던 사람
깃내린 새처럼 그렇게 말한 사람
 
 

민주당원 시절 현대중공업에서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중이던 노조원과 함께 담배를 피는 모습.

 

 

 

     우린 아무도 노무현을 몰랐다

 


어제 아침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켜놓은 휴대폰 DMB에서 나오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귀를 의심했다. 처음엔 남의 나라 이야기이겠거니 했다.


비가 뿌리다 긋다 하는 하늘이었다.

문득 한 지인이 다가와 소식을 다시 확인해줬다.


대통령을 지낸 분이 자살하다니...성숙한 삶의 태도와 신중함이란 교과서적인 덕목을 떠올리며,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괜한 한숨이 나오고

심장이 벌럭벌럭거렸다.

 

자살은, 경박이나 무모함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없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의 유일한 것, 혹은 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것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다. 그 결연함을 예찬할 수도 없고,

그가 느꼈을 억울함과 비통함, 그리고 절망감을 뒤늦게야 알아챈듯 호들갑 떨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악독한 심정으로 평소의 냉소를 유지하여, 죽은 이의 영면 앞에서

칼을 품은 댓글을 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자살이 모든 것을 묻을 수도 없고

또 문제와 책임까지를 덮을 수도 없고, 그를 단순한 피해자나 순교자로

만들어줄 수도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죽음까지 선택하며

그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절박하게 소통하려 했다는 그 기호만은 읽을 수 있다.

 

 

자살은 매일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문제라고

말한 사람은 알베르 까뮈였다.


그것은 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며, 생의 비전과

자아에 관한 엄혹한 심문이다.

 


죽으면 나는 무엇인가. 세상과의 관계는 모두

끝이 나는가. 어느 절에서 목탁소리와 종소리, 염불소리가 들린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정치 역정 속에서 실천하고 관철해온 뚜렷한 공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첫째는 권위주의의 청산이다. 공권력과 기득권에 덧붙여진

거대한 더께와 같은 권위를 그는 용감하게 무너뜨렸다.


심지어 그 자신이 누릴 수도 있었던 권위마저 그는 무너뜨렸다.


그것은 그에게 영광이기도 하고 일정한 수모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권위는 세상의 공기를 억누르는 구질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권위에 길들여져 그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기도 했다.


그랬기에 노무현의 권위 청산은 전세대에게는 불편함이기도 하고 위태로움이기도 했다.

 

 

둘째는 소통의 마당을 대중화했다는 점이다.


물론 시대의 변화와 기술의 진보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는 일방통행의 언로와 그 언로의 장악을 상당 부분 깨버렸다.


기득권 언론에게는 이것이 상당한 위협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좋아했고 토론을 즐겼다. 그 토론 속에서 인간적인 흥분이나

격정을 드러내는 것까지를 포함해서 그는 소통의 공기 자체를 가치로 느낀 사람이었다.

 


세째 그는 이 땅에서 자주 수상하고 불온한 사람으로 여겨져왔던

'순수한 좌파'들을 정상적인 국민으로 복권시켰다.


이것은 그의 이념을 실천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이념의 자장을 넓혀 문제를 읽는 성숙한 틀을 가지려는 나름의 역사적인 소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일정한 미덕과 함께 다른 문제도 논의되어야 한다.


부자에 대한 적개심이나 증오에 가까운 혁신적 정책들과 국제적 흐름과 국민의 여론 사이를 중재하지 못한 외교,


그리고 세계적 경기 침체와 맞물려 있긴 하지만 대책없이 무너졌던 경제,


또 경박하게 느껴졌던 발언들과 결정들, 포퓰리즘으로 불렸던 여론 추수주의까지도

그의 행보와 족적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당연히 범죄 사실에 대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상대가 정치 권력의 한 축이 될 수 있거나 되어있는 존재인 만큼, 정치적인 성격 또한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받은 '돈'에 관해, 국민들이 이미 술자리에서 내린 판결은, '푼돈'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금액 자체가 푼돈일 수는 없으나,

그에 앞선 전직 대통령들이 받았고 누렸고 보유하고 있고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돈에 비하면, '범죄'로 보기엔 정서적으로 민망한 그런 돈이라는

의견들이 돌아다녔다.


더 밝혀져야할 무엇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민들은 그렇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검찰이 그의 가족과 정치적 동지들을

집중적으로 수사한 것은, '작은 범죄'라도 허용되거나 묵인되어서는 안된다는

정치적 선진화의 소신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당한 폭발력을 지닐 수도 있는

'노무현 장외 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담은 것으로

비쳐진 게 사실이다.


그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그의 힘을 이루고 있는

도덕적 신뢰 기반에 하자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수사는 그것을 찾아냈고

결국 '깨끗한 노무현'의 신화는 무너지고 말았다.

깨끗함을 더럽히는 것은 크지 않은 액수의 돈이라도 충분했다.


노무현의 봉하공동체와 인터넷을 통한 여론 정치의 꿈은

이념으로 전쟁을 치른 나라에서, 그 나름의 유연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는 추동력을 그 안에서 만들어내겠다는 꿈이었다.

권력 쪽에서 보면 이런 구상은 불온하고 위험해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위험의 증거를 지난 촛불시위와 쇠고기 파동으로 정부는 충분히 실감했다.


촛불 여론은 정부 권력의 정당한 집행을 불가능하게 했고

인터넷이 촉발하고 인터넷이 확산시킨 시위와 저항은,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 이슬'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굴욕적인 여론청취로 나아가게 했다.

 

인터넷과 촛불이라는 온오프가 결합된 '유비쿼터스 시위'는

권력이 가장 경계해야할 문제로 떠올랐고, 이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정부는, 이 문제를 '안정화'하는 일에 공력을 기울여왔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신망과 인기는, 인터넷 여론을 언제든지 폭발시킬 수 있는

잠재적 킬러콘텐츠였다. 정권은 이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진행된 수사는, 당초의 짐작과는 달리

상당한 성과를 내고, 그의 가족과 인간 관계를 파탄내는

파괴력을 보였다. 검찰이 입증한 금품수수는, 국민들에게

그를 '겉속이 다른 이중인격'으로 각인시켜나가면서,

그에게 타격과 좌절을 안겨줬을 것이다.


그런데 재임시절 '탄핵'으로 혀를 내두를 만한 뱃심을 보이며

되살아났던 그는, 거의 아마도 짐작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수사에 대응했다.


유례없는 전직 대통령의 자결은

경악 속에서 국민적인 애도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

 

왜 그는 이런 방법을 택했을까. 그의 유서는

자책의 2줄과 절망의 4줄을 앞에 쓰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앞으로 받을 고통'이란 말은 주어가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혹은 자신을 포함한 우리)을 가리키는 듯 하다.

스스로의 정신적인 가책과 수모를 말하는 것이리라.


앞으로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전망을 잃었고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욕도 잃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소박한 삶의

일락들조차 누릴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 '억울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권력의 누군가를 원망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말했다.)


상대에 대한 얘기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의 문제에 깊이 상처받고 웅크리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된 것이 누군가의 악의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그가 퇴임할 무렵, 말했던 것처럼

그는 죽음을 택하는 자리에서도

'그의 생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잘한 것도 있었다'고

소박하게 평가받기를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살이란 인간이 스스로를 가장 고독하게 만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왈가왈부하기 어려운 심경의 착잡함과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와 격하고 단호한 감정의 집중이, 죽음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상태이다.


그 고독한 자리와 입을 다문 침묵, 세상의 정적.

그리고 불가사의한 곳으로의 탈주. 그 정황들과 결과들을

자기 삶의 잇속 속에 끼워넣어 재단하고 이용하는 무리들은

참으로 가여운 자들이다. 당신들 목 뒤에 와 있는
사신(死神)을 돌아보라. 누구나 얼마 안 있어 죽는다.

 

그 죽음의 선택이 설령 옳지 않고 적당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최선을 다해 살고 최선을 다해 돌아갔다.

 

아무도 몰랐던 그를, 이제 가만히 눈감게 하라.

 

 

 

 

펌글입니다

 

 

고단한 한 생
애쓰셨읍니다

많이 슬픕니다
편히 쉬십시요...


나윤선 / 사의 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