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여행의 추억/해외여행

[2009.1월] 국경의 섬 대마도를 찾아서 (첫째날)

인생멘토장인규 2009. 1. 20. 18:04

여행지  (對馬島 づ しま.thusima)

여행일   2009.1.1718

   

   흔히 '국경의 섬'이라 불리는 대마도를 1박2일로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작년 동서의 환갑을 맞이하여 가고자 하였으나 못가고, 이번에 동서의 생일을 맞이하여 가까운 가족끼리 함께 한 프로그램이다. 동서부부와 사위가족,고모,언니 그리고 우리 부부해서 도합 9명이 부산에서 가까운 대마도를

여객선을 이용하여 다녀왔다. 2007년 7월 부산에서 여객선을 이용한 대마도여행이 가능해 많은 사람들이 대마도를 찾았으나, 엔화에 대한 환율상승으로 한국 여행객이 최근에 많이 줄어 든 탓인지 운행 회수도 줄고 해서 국제여객선 터미널은 생각보다 그렇게 번잡하지 않았다. 등산복차림과 낚시도구를 맨 여행객이 대부분이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맑은 날이면 늘 보곤했던 섬인탓인가  해외여행이라는 생각보다는 부산 앞바다의 섬을 찾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배를 타고 거제도를 찾았다가 배멀리로 고생했던 아픈 추억이 있었던 지라 , 비록 배멀미약은 먹었으나 내심 불안했었는데 다행히 배의 요동은 전혀 느끼질 못하고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휴 ㅎㅎㅎ

이번 일정은 대마도의 행정수도라고 할 수 있는 하대마에 위치한 이즈하라에 도착하여 관광을 하고 1박을 한 후, 쭈욱 올라가 상대마의 히다카츠로 해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일본본토 여행은 두 차례 하였으나 그 어느 곳 보다도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대마도. 그래서인지 대마도 여행은 역사탐방을 다녀온 기분이 든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비록 일본 어느 곳을 가더라도 그들의 사찰격인 신사관람을 빼고는 말이다.

이제 사진을 정리하며 여행의 감흥에 다시 빠져본다.

 

▣ 대마도의 개요

소속: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쓰시마시.
면적:708㎢ (울릉도의 약 10배, 제주도의 약40%, 섬 전체 89%가 산림지대)
거리:대마도에서 한국 부산까지 49.5㎞ (일본 후쿠오카까지 138㎞)
인구:약 4만 2천(2004)

 

 대마도는 부산까지 49.5Km  일본 후쿠오카까지 138km이며, 본섬외에 107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있고,  그 중 5개섬이 유인도라 한다. 상대마 하대마 두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고 두개의 섬은 다리(만관교 :만제키바시)로 연결되어 있다. 남북 82km, 동서 18km로 가늘고 긴 모양의 섬. 복잡한 리아스식해안으로 연장길이가 915km이며 섬면적의 89%가 산림지형으로 울창한 산림이 해안까지 이어져 있다.

중심도시는 이즈하라[嚴原]이며 이곳에 전체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고 있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예로부터 한국과 대륙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자주 출몰하자,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유책 ·귀화정책 등을 쓰다가 세종 때에는 이종무 장군이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으며,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고군이 고려군과 함께 상륙한 기록이 있다.

  뒤에 쓰시마도주(島主) 소[宗]씨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을 독점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으며, 러일전쟁시에는 일본의 전쟁영웅인 도고의 전략으로 상대마와 하대마를 가르는 운하를 개통하여 아소만의 지형을 이용한 쓰시마해전으로 대승을 거둬 러일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된 곳이기도 하다. 도고가 기자들의 질문에 '영국의 넬슨제독과는 비교 할 수가 있으나, 중앙정부의 도움도 없이 모든 해전에서 승리를 한 조선의 이순신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대마도는 우리민족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섬이다. 12회에 걸쳐 일본에 문물을 전한 조선 통신사 일행이 이 섬을 거쳐 지금의 동경인 에도로 들어 갔고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남부 해안지역을 노략질하던 왜구의 근거지로 수회에 걸쳐 조정에서 정벌에 나섰던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대마도에는 한국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들이 분포돼 있다. 이같은 역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대마도를 모르고는 일본을 이해할 수조차 없다고까지 말한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산촌에서는 숯 구이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이었으나 지금은 조림이 이루어져 숲이 울창하다. 오징어 ·도미잡이와 전복 ·소라 ·성게 ·천연김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여 이곳의 진주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중심도시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그 시주사인 보리사[菩提寺] 등이 남아 있다.

  현재 육상, 해상, 항공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본 최 서북단 군사 요충지이자 이끼섬과 더불어 일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일본 관광객이 왕래하고 있으나 젊은층은 본토로 빠져나가고 노령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고 한다.
인공림의 대부분은 쓰기(삼백나무)와 히노끼(측백나무)이며 이를 경제가치로 환산하면 일본 국민이 3년 동안 먹을 식량과 교환이 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붉은 색 도로가 대마도의 주도로이며 국도인 382번 도로이다. 이 남북을 잇는 이 도로도 1971년에 개통된 것이다. 그 이전의 교통은 모두 뱃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마도인은 배와 함께 운명을 함께한 것이었다.

이 종관도로는 옛날의 사신로(使臣路)였다. 조선통신사가 지나던 길이다. 이 길 주위로 작은 관청들이 있었다. 

북단인 하타카츠에서 이즈하라까지는 50km-60km의 속도로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제한 속도가 60km이며 구간에 따라 40km인 곳도 많다. 길이 좁고 구비가 많으므로 속력을 더 낼 수도 없으며 도로가 2차선으로 된 곳은 사정이 아주 좋은 편이나 대부분의 도로가 일차선인데 그래도 용하게 마주 오는 차를 잘 피해다닌다. 때로는 좁은 길에서 서로 마주치면 후진하여 대피하였다가 다시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 대마도 탐방 (첫째날)

 

▲ 우리를 실어 나른 드림플라워호. 부산에서 이즈하라까지 2시간 20분 소요.

 2007년 7월14일 대아고속해운이 항로를 개설함으로써 순조 11년(1811년) 마지막 12회째의 조선통신사 일행 500명이 다녀간 이후 188년만에 대규모 관광객이 발을 내딛었고 등산객, 낚시꾼 등 특히 여름철에 여행을 하는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으나 최근 환율상승으로 그 수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한다. 대마도여행은 요일별로 여행비가 차이가 난다. 요일에

따라 도착항구와 출발항구가 다르므로 잘 파악하고 떠나야 한다.

 

▲ 선실안에 있는 자그마한 면세점. 이 곳에서 에쎄 한 줄을 샀다. (15,000원)이니 일단 만원 벌었다^^

 

▲ 하선하여 입국장으로 가는 길. 우리 여객터미널과 비교해선 안된다. 인구 2만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어촌이니. 입국심사대로 가는 길과 계단이 협소하여 많은 관광객이 동시에 내릴 때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2007년 7월 조선통신사 행렬이후 최대인 100여명의 한국 관광객이 대마도 이즈하라에 첫 발을 내딛였을 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국 관광객들을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듯 깍듯이 맞아들였고 편안한 관광이 될수 있게 배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일 교류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된 대마도는 옛 조선통신사의 후예들이 더욱 많이 방문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나 뒤에 나오겠지만 관광객들의 불미스러운 일로 한국인의 입장을 거절하는 안내문을 붙인 식당과 술집도 여럿

있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관광객들이 소비하는 돈이 큰 도움이 될텐데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 이즈하라터미널. 가방을 들고 좁은 계단을 거쳐 겨우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와 대기한 봉고에 짐을 실었다

  봉고에 짐을 싣고, 여기서 부터 저녁 숙소에 도착할 때 까지 주변에 있는 관광지를 도보로 탐방한다.

  이즈하라지구 유적지가 대부분 항구 근처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와 연결된 시내하천을 따라 좌우로 모든 곳이 밀집되어 있어 혼자서도 충분히 자유여행을 도보로 즐길 수 있다.

(클릭하면 크게볼 수 있음)  

 

▣ 팔번궁신사

 

▲ 이즈하라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팔번궁신사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신사로 대마도의 대표격인 신사다. 연중무휴에 입장료는 없으나 보물전 관람은 따로 돈을 내야

한다.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인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의 증거를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보물관에는 三十六歌仙 두루마리 그림이 장관이며 소서행장의 딸로서 19대 대마도주

소 요시모토와 결혼한 마리아를 참배하는 신사가 있다.

 

▲ 신사입구 어디에나 있는 손을 씻는 곳. 모신 신을 참배하기전 죄를 씻는다 한다.

  일본의 신사  어디를 가더라도 손을 씻는 곳이 있다. 처음 오른손으로 물을 떠서 왼손을 씻으며 과거에 지은 죄를 씻고, 다음은 왼손으로 물을 떠서 오른 손을 씻으며 지금의 죄를 씻고, 마지막으로 입을 씻어 말로 지은 죄를 씻는다고 한다.

 

▲ 불길하게 나온 점괘는 이렇게 주위의 나무 등에 걸어 두고 간다고...

신사내부에는 '오미쿠지'라고 적힌 점을 보는 자동기가 설치되어 있다. 점을 보아 불길하게 나온 것은 이렇게 신사에

걸어두고 감으로써 액막음을 한다고 한다. 좋은 것은 가져가고 나쁜 것은 두고... 

 

▲ 소원을 적어 걸어두는 곳에 한국관광객이 걸어 놓았나 보다. 망언을 일삼는 일본인들에 대한 경고인 듯..

 

▲ 팔번궁신사의 본당. 일본의 종교는 다신교이다. 신사마다 모셔 놓은 신들이 모두 다르다. 하여 우리와

    달리 내가 가는 절과 교회와 성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모셔진 신을 쫓아 신사를 찾는

    다. 집안에 수험생이 있으면 학문의 신이 모셔진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하고 소원을 비는 것이다.

 

▲ 탐스럽게 열린 귤. 이렇게 귤나무를 심은 집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대마역사 민속 자료관

조선통신사 행렬도, 초량 왜관도 등 다양한 유물과 쓰시마 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 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박제로 보관되어 있다. 자료관입구에 있는 동종은 한국전통양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독특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대마도의 포경어업(고래잡이)의 기록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어 옛 대마도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수 있다. 민속자료관 일대에는 "조선통신사비", "고려문", "성신지교린비" 등이 있다.

자료관 내부에서의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 대마민속자료관

 

▲ 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비는 169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 을

가져다 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비교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禮)-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함-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한다.

 

▲ 조선통신사행렬도 中 정사가 탄 가마를 수행하는 그림. 이즈하라 시내를 흐르는 하천벽에 붙여져 있는

    것을 찍은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토요토미의 조선침략이후 한일간 국교회복을 위해 왕래한 외교사절단으로 토쿠가와 막부시대 200년간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이 12회에 걸쳐 이뤄졌다. 조선통신사행렬은 작은 섬 대마도의 문화를 한차원 끌어올리는 역사

적 대사건으로 남아 있다. 통신사 일행의 규모가 약 400500명인데다 이들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일본 본토의 에도에서부터 마중나온 호위병과 신하들이 2천여명에 이르러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 도착하면 이 섬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일본 역사자료에는 매년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향하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식량과 의전으로 고민하던

대마도 도주의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통신사 행렬의 장엄했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고려문

  조선통신사를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만든 문 이라고 한다. 화재로 소실 된 것을 재건축 하였다.조선문이라 하지

  않고 '고려문'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그당시 한국이 대외에서 불려진 이름이 '고려'였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 성신지교린비

  아메노모리호슈(1668-1755) 선생이 주창한 "성신지교린"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호슈 선생은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1727년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서 생겨나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 건물이

시내에 남아 있다.

 

▲ 대마도 도주의 성이었던 금석성의 정문입구. 

 

  축조된 성곽은 백제양식을 닮았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다

 

▲ 성벽만 남아있고 문은 1990년 재건된 것이다.

 

▲ 덕혜옹주비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결혼봉축기념비이다.덕혜옹주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는 고종이 회갑연에 얻게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덕혜옹주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는 한국에 알려진 것처럼 난폭하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일본 동경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하였고 유화그림(대마역사자료관에 전시 중)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등 시서화에 두루 재질을 보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금지옥엽 조선옹주가 일본의 섬 백작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자 조선왕실은 발칵 뒤집혔고 1930년 이미 4년 전에 이복 오빠인 순종황제가 돌아가시고 나선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할 사람마저 없었던 때에 이루어진 이 결혼식에서 상궁나인들은 상당한 치욕과 옹주를 동정하는 마음에 섬 백작에 관한 진실을 곡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백작이 애꾸에 곱추에 난폭하고 배운 것 없는 농장 주인인데 일본정부가 옹주와 결혼시키기 위해 편법으로 백작으로 만든 거라는 소문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아무도 정정을 해주지 않자 조선 내에서는 사실로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사실 종무지 백작은 애꾸도 곱추도 난폭하지도 배운 것 없는 농장주도 아니었다.
종가는 대대로 대마도를 통치한 집안으로 종무지는 그 후손으로 대마도를 상속받았지만 명치유신으로 폐번치현(번이 없어지고 현으로 바뀌면서 번주의 자치가 사라지고 천황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제가 시작됨)이 되자 황실에서 도주의 작위를 폐하고 백작의 작위를 하사한 것이다. 종무지의 후원자는 다이쇼천황의 부인인 사다코 황후로 종무지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조선왕가의 딸로 지참금이 상당했던 덕혜옹주를 맺어주어 그 재정난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사다코의 중신으로 맺어진 두사람은 다분히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초반에는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황실로부터 백작위를 하사받은 종무지는 대학교수로 훗날 태어난 딸 마사에도 상당히 사랑하여 손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고 한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꽤 오래된 것으로 아버지의 죽음 후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와 일본인 귀족학교에서 이지매를 당하면서 향수병과 함께 커졌고, 어머니인 양귀인의 죽음 이후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덕혜옹주의 병이 점점 심해지자 종무지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 시켰고, 1951년 사다코 황후가 사망하자 이혼하게된다.
그 후 종무지는 일본인 여성과 재혼하지만, 해방 후 1962년에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는 한번 보고싶다고 찾아 왔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옹주의 충격을 염려한 측근에 의해 거부 당했다고 한다.
덕혜옹주와 소다케유키는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 만송원

  대마도는 종(宗)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다스린 섬으로 만송원은 종가(宗家) 20대 영주였던 종의성이 선친이었던 종의지의 명복을 빌기위하여 세운 보리사란 절이 있고 역대 영주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종의지는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이었던 소서행장의 사위로서 전쟁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전쟁중에는 장인이었던 소서행장의 부대에 배속되어 참전하였다. 임진, 정유재란이 끝난 후 일본은 두 개의 큰 세력으로 나뉘어져 세키가하라라고 하는 곳에서 전쟁이 있었는데, 이 전쟁에서 장인인 소서행장이 가담한 서군에 종군하였으나, 패한 후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임진, 정유재란 후 종의지는 조선과 일본의 국교회복에 앞장서 그 공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만송원의 본당에는 1811년(마지막 조선 통신사) 조선통신사로부터 선물받은 삼구족[三具足]이라는 제구가 전시되어 있으며, 에도시대 역대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원내를 돌아 계단을 오르면 19대 영주였던 종의지를 비롯한 그 이후의 역대 영주들의 무덤이 있으며 일본의 3대묘소로서 유명하다.

 

▲만송원 가는 길 안내판. 뒤의 건물은 이즈하라시청이다.

 

▲ 만송원내에 있는 보리사법당내부.

 

▲ 조선왕이 조선통신사를 통해 하사한 삼구족

 

▲ 보리사입구에 있는 돌로 만든 북.

  이것은 우리의 신문고와 비슷한 것으로 북의 뒤쪽은 구멍으로  뚫려져 있어 앞을 치면 큰 소리를 낸다고 한다.

도민들이 영주에게 하소연할 말이 있을 때 이를 두드려 호소했다고 한다. 영주가 선정을 베푸는 방편으로 삼았나 보다.

 

▲ 이 계단을 오르면 역대 영주들의 무덤이 나온다. 가파른 계곡을 편하게 오르라고 긴 지팡이를 입구에

세워두었다. (단체로 찰칵!)

 

▲ 역대 영주들의 무덤이 있는 만송원

 

▲ 엄청난 크기의 스기나무

 

▲ 돌에 파여진 구멍은 나무에서 떨어진 빗방울에 의해서라고 한다.

 

▣ 서산사

  오늘 우리일행이 일박을 하게될 서산사. (본래 여행상품은 호텔이었으나 , 우리 일행만 이곳을 원하여 오게 됨)

서산사는 현소라는 승려가 창건한 절로서 현소는 왕사로서 조선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경내에는 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방문한 김성일 부사의 기념시비가 후손에 의해 세워져 있다. 조그마한 절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조선과는 인연이

어 임진왜란 후 조선과의 국교가 회복된 후 일본의 막부(중앙정권)는 조선과의 모든 외교는 대마도 영주에게 일임하였
는데 그 실무를 보았던 곳이 서산사로서 수백년간에 걸친 외교의 가장 중심이었던 곳이 이곳이다. 그 외에도 조선통신
사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통신사의 중심인물이 숙박한 곳으로 임진왜란 후 특사로 일본에 파견된 사명(송운)대사가 
숙박을 하기도 하였다 한다. 경내는 작지만 잘 꾸며진 정원이 있어 일본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서 유스호스텔을
겸하고 있다.
서산사를 찾아가면 3군데의 볼거리가 있는데 이태안의 건축물(본당)과 김성일 부사의 시비(詩碑),그리고

현소의 석상이다.

 

  방마다  욕실이 있는 호텔을 두고 이 곳  서산사에 투숙한 것이 참으로 잘 했다는 생각이다.

비록 공동목욕탕과 각 층에 있는 공동세면장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지만, 스님 내외의 친절함과 다다미로 된 일본식

전통방에서의 하루밤. 다음날 아침의 정갈한 아침식사까지 마치 일본 가정에 초대를 받아 하루 대접을 받고 나온

기분이다. (술판을 벌리고 왁자지끌한 단체여행은 문제가 있겠지만 가족끼리의 여행이라면 정말 추천하고 싶다)

 

▲ 서산사입구

 

▲ 서산사 본당

이태안(1611?) 의 건축물. 현재의 건축물은 화재로 손실된 것을 복구한 것이나 입구부분의 구조물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조선통신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옛 대조선 외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로 갔던

김성일부사가 이 곳에서 유하며 현소와 詩를 주고 받았다 한다.

 

▲ 학봉 김성일 선생 시비

김성일.1538(중증 33)∼1593 (선조 26) 본관은 의성이며 영남의 대 유학자라 일컬어진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조선 선조 대왕이 왜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황윤길과 함께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필히 왜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황윤길의 의견과 반대의견을 보고하여 당시 동인과 서인의 세력 갈등의 상황에서 우위였던 동인 세력인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과의 교분이 깊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대왕의 처벌의지에도 유성룡이 적극 변호하였다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종군하다 병사하셨다. 경내에 있는 시비는 의성 김씨 문중에서 설립하였다고 한다.

이 절의 주지스님이었던 현소는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 승려가 되어 1588년(선조21년)부터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許筬)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했으며 ,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고니시(소서행장)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이덕형 등과 강화회담에 <야나가와 초신>과 함께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서산사 뒤 산기슭에 현소의 부도탑이 안치되어 있고 김성일 선생의 시비도 나란히 서있다.

 

▲ 서산사 본당옆에 세워진 지장보살상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또한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고통받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여섯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 상응하는 6가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지장보살은 9세기경부터 널리 숭배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의 보호자이자 서민들에게 여러 가지 축복을 주는 보살로 숭상이 되어 대부분의 일본신사에 세워진 불상은 어린이를 상징하는 턱받이 수건을 두르고 있다.

 

 

▲ 서산사 경내의 누각과 돌부처.(이 또한 목에 수건을 두르고 있는 지장보살이다)

 

▲ 서산사의 전형적인 정원모습.

돌 두개가 놓여져 있을 뿐이다. 돌이 땅이면 자갈길은 바다가 되고, 돌이 하나의 별이면 자갈길은 하늘의 구름이 되고

정원은 우주 그 자체가 된다고... 해석이 그럴 듯 하다.^^

 

▲ 절옆의 공동묘지

사찰옆에는 어느 곳이든 이렇게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납골당이다. 일본인들의 무덤은 납골묘형태이며 묘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전설따라 삼천리에 자주 등장하는 무덤속에서 나오는 귀신탓인지 무덤을 두려워 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함께 살았던 가족이었기에 가까이 두고자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 이시야끼 요리

호텔에서 짐을 찾아 서산사로 짐을 옮겨온 우리일행은 경내를 둘러보고  잠시 쉬었다가 저녁식사를 위해 시내로

향했다. 오늘의 특식메뉴는 대마도 5대진미중 하나라는 이시야끼.

이시야끼는 어부들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요리법을 만들어낸 독특한 생선요리로 대마도의 대표적인 맛으로 손꼽힌다. 갓잡아 올린 생선과 조개에다 대마도 특산인 표고버섯과 각종 야채를 모닥불로 달군 돌위에 얹어 소고기 돼지고기와 함께 구워먹는 것으로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신선한 생선을 재료로 쓰기 때문에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고 불에다 직접 굽지 않고 미리 달군 자연석위에 얹어 굽기 때문에 타지 않아 정갈한 맛을 내는 것 또한 특징이다. 4인 이상이어야 시킬 수 있다고.

한사람에 3,000엔으로 지금의 환율로 약 45,000원이니 꽤 비싸다.

 

▲ 개인별로 나오는 튀김과 닭다리 한 개. 소스들

 

▲ 두 사람에 한 접시씩 나오는 고기와 가리비, 참치 와 야채류. 돌판위에 얹어 구어 먹는다.

 

▲ 네 사람당 한 접시씩 나오는 생선회.  이 사람들은 매운탕은 모르는 모양이다.

 밥은 여전히 공기밥과 국인 미소시루다. 매운탕생각이 간절하지만 어쩌랴. 아~ 아까운거 ㅋㅋㅋ

 

▲ 아사히맥주와 가지고 간 소주를 반주삼아 즐거운 식사를...

 

식사를 마치고 여자들은 숙소로 돌아 가고 동서와 조카내외랑 맥주 한잔 더하기 위해 일본식 선술집을 찾았다.

 

▲ 마치 아파트현관문처럼 생긴 이곳은 여자가 서비스를 하고 노래도 부르는 술집이다. 물론 노래도

   한 곡당 돈을 지불해야 한다. 공짜가 아니다 ㅎㅎㅎ

 

▲ 비슷한 문구의 안내문이 부착된 술집이 여럿 있어 가슴이 아팠다...

 

▲ 붉은 등이 내걸린 선술집. 노인 두 분이 운영하고 있는 작은 술집이다. 오뎅 등 눈에 익은 안주들이

    서먹하지 않다. 홀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 모두 이곳 사람들이었는데 "어서오세요" 하고

    인사를 하여 깜짝 놀랬다.

 

▲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솔직히 생맥주는 일본 것이 맛있다. 정종은 내입에 맞지 않고...

    마지막으로 동서랑 조카사위랑 건배를 하며 오늘의 피로를 푼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