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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겔- 장님의 우화 2/2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7. 14:24


[그림]Bruegel the Elder, Pieter(Flemish,1525-69)◈The Parable of the Blind Leading the Blind(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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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의 우화


      
      

      이그림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자

      소경 여섯이 나온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서 세상 무대를 건넌다.
      첫째 소경이 먼저 웅덩이에 빠졌다. 그가 끼고 다니던 악기도 박살났다.
      둘째도 덩달아 비틀거린다. 눈두덩이 움푹하다. 누군가 그의 눈을 후벼팠다.
      셋째도 걸음을 가누지 못한다. 눈이 흰자위를 뒤집었다. 흑내장이다.
      넷째는 각막백반. 소경 가운데는 나면서부터 신의 은총을 여읜 사람도 있지만,
      제가 지은 죄값으로 눈알을 뽑힌 사람도 있다.

      셋째 소경은 멈칫하는 순간 교회를 올려다본다.
      저 멀리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는 첨탑을 뽐내며
      어리석음의 구렁에 실족한 죽음의 행렬을 내려다본다.
      넷째 소경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곧 닥칠 일을
      보지 못하는 건 눈뜬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경들은 하나같이 엉터리 예언자처럼 지팡이를 들었다.
      무지와 거짓은 둘 다 지옥으로 직행하는 무거운 죄악이다.
      길 잃은 인도자를 따라서 여섯 소경 모두 끈 떨어진
      염주처럼 줄줄이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다.
      구렁텅이에는 일곱 가지 악덕이 우글댄다.

      브뤼겔은 소경 여섯을 길게 펼쳐진 넓은 가로 무대에 배치했다.
      지평선은 높이 끌어올렸다. 이들은 걸인, 순례자, 나그네 차림이다.
      세상의 무대를 지나가는 이들의 행렬은 해골들이 서로의
      뼈를 맞잡고 추는 죽음의 무도를 닮았다.

      소경들의 머리를 사슬로 묶어 보면
      왼쪽 지평선 부근부터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해서
      차츰 오른쪽 화면 모서리로 곤두박질친다.

      지평선과 소경들의 행렬은 다른 방향이다.
      그림 속의 큰 동선을 두 개 끄집어낸다면 지평선과 사선이다.
      이 둘은 그림 왼쪽 귀퉁이에서 시작해서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브뤼겔의 그림이 대개 그렇듯이 하늘 꼭지에 눈을 두고 내려다보면,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자기도 모르는 커다란 운명의 수레바퀴에 실려서
      서서히 회전한다. 그렇다면 소경들의 비극은 단지 그들의 불행이 아니라
      눈뜬 소경들이 타고 있는 바보 배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아니면 섭정기 네덜란드의 암담한 운명에다 성서의 비유를 씌웠는지도 모른다.

      그림 왼쪽 아래 귀퉁이에는 마른 관목 한 그루가 을씨년스럽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는 ‘플루토의 나무’ 또는
      기독 도상에서 자주 나오는 ‘사망의 나무’다.
      반대편 오른쪽 귀퉁이 여울가에는 풀꽃이 한 송이 피었다.
      붓꽃이다. 기독 미술은 꽃잎이 칼날처럼 생긴 붓꽃을 덕목의 꽃말로읽었다.
      웅덩이에 빠진 첫째 소경은 팔을 들어 붓꽃을 더듬는다.
      사망의 계곡에서 구원의 향기를 맡았다.

      그림 밖을 내다보는 이가 있다. 흰 고깔을 쓴 둘째 소경이다.
      그는 우리와 눈길을 맞추면서 외친다.
      실명의 눈짓으로 삶의 헛된 가치를 증언하고
      죽음의 행렬에 따라 붙으라고 초대한다.

      브뤼겔은 빛과 그림자를 움푹하게 패인 눈두덩에 고루 발라 두었다.
      부재가 존재에 대해 이처럼 사무치는 견인력을 가졌던 적은 드물었다.
      성서를 설교하는 그림 속의 안내자가 이처럼 공허한 눈빛을 소유했던 적도 없었다.






"끝"


 

200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