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의 '납치'
겁탈의 순간을 나이든 거장답게 관조적인 입장에서 제시했던
앞에서의 작품 과 젊은 세잔이 그린 이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은
아주 그럴 듯한 경험이다.
세잔에게 있어 겁탈의 의미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두려운 가능성으로서의 겁탈이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세잔의 작품은 겁탈이 아니라 '납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두 세계가 엄격하게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잔의 일생을 고찰해 이 작품을 보면,
우리는 어린 소년에서 벗어나 성숙한 남자가 되기 위해
고통스런 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 젊은 남자를 연상할 수 있다.
즉 작가자신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작품은 마치 작가 자신의
액막이(가정이나개인에게 닥칠 일을 미리 막는 일)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세잔은 늦된 청소년기를 보내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불건전하고
유혹적인 혼란들로 몹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런 혼란들은 그의 정서를 음울하게 만들었다.
두껍게 칠해 진 물감들이 어두운 세계( 겁탈, 원한, 불행 등)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싸우던 당시의 감정적인 혼란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런 어두운 세계와 스스로 거리를 두기 위해 그림 속에서 그는 사건을
목가적인 배경 속에 위치시키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배경에는 두 명의 님프가 한가하게 장난을 치고 있고,
납치를 하고 있는 젊은 남자의 머리카락도 세잔이 이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당시의 일반적인 남자들의 머리 스타일보다 더 길다.
즉 사건을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설정함으로써
세잔은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림 속의 두 남녀를 통한 에로틱한 분위기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남자의 색채가 짙은 몸의 근육들은 긴장돼 있지만,
우리는 그의 얼굴을볼수 없다. 또한 여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 힘도 쓸 수 없이 하�게 질려버린 그녀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축 늘어져 있다.
얼핏 보기에는 이 젊은 남자가 기절한 자신의 여자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림을자세히 살펴보면,
곧 뭔가 나쁜 일이 생길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풍경이 바로그러한 점을보여준다. 이 두남녀를 에워싼 침침한 숲은
그들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 하늘은 어둡고 산은 지평선을 가리고 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이 이 두남녀가 갇혀 있다고 소리치는 듯하며,
피해자인 여자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썩어가는 낙엽뿐이고,
공간전체에 사악한 기운이 서려 있다.
꿈틀대는 물감들은 바로 그의 어둡고 혼란스러운 상상력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개인적인 절망이 아주강하게 느껴진다.
세잔은 비난받을·일을 한 적은 없었지만, 당시 그의 삶은 무언가
극심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이 두려운 사건의 배경은 、
바깥의 어딘가가 아니라, 바로 화가 자신의 내부였던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솔직함과 용기는 보는 이를
감동시키는 것을 넘어 오싹함까지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