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Rembrandt(네,1606-1669)◈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669)
돌아온 탕아
12월엔 생체시계와 심리 시계 바늘이 다른 달보다 유난히
빨리 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초자연적인 우주의 힘이 시간을 빨리감기하는 바람에 설령
시간치인 사람일지라도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12월을 가르켜 용서와 화해의 달로
부르는 것도 마음속에 흥건히 고인 분노와 증오심을 세월이 탈수
시키기 때문은 아닐까 하여, 한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걸맞는
용서와 화해의 본보기가 될 명화를 소개한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인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이다
[그[그림]Rembrandt◈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Detail
화면에 총 6사람이 등장했다. 그러나 관객의 눈길은 화면 앞쪽 환한
빛을 받고 있는 두사람의 행동에 단연 집중된다.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가 바닥에 철퍼덕 무릎을 꿇은 채
노인의 품안에 얼굴을 묻었다. 노인은 그런 남자의 허물없는
행동을 탓하기는 커녕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을 띈채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싼다. 이광경을 지켜보는 네사람의 표정에 만감이 교차한다
마치 연극의 한장면처럼 보이는 이그림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두사람은 부자지간이다. 노인은 아버지이며,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는 남자는 아들이다. 철없는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집을 뛰쳐나가 가산을 탕진하면서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무일푼의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게 된
아들, 그의 마음에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다.
[그[그림]Rembrandt◈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Detail
아버지가 과연 불효 자식을 용서 할것인가, 아니면 냉담하게 내칠 것인가
그러나 공연하 기우였으니, 아버지는 못난 아들의 행동을 너그럽게
용서한 것이다. 아들의 어깨에 놓여진 저 아버지의 손을 보라.
안쓰러운 듯 어깨를 감사는 아비의 두 손은 진한 부성애를 보여준다.
저 손은 힘을 가진자가 약한 자를 기꺼이 품안에 받아들이는
자비를 대신한다. 이처럼 아버지의 손에 사랑을 담았다면
아들은 발을 통해 용서를 빈다. 그는 상처투성이의 발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드러낸다. 맨발을 보인 것은 항복을 의미한다.
즉 당신의 처분에 몸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그[그림]Rembrandt◈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Detail
렘브란트의 위대함은 손과 발에 감정을 담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용서를 비는 아들의 뒷모습을 그렸다.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감정을 훨씬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
또한 얼굴을 가린 것이 관객의 동정심을 더욱 강하게 자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혈육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사람의 옷을
같은 색으로 통일하였다. 렘브란트는 이처럼 관객의 심리를
꿰뚫는 혜안에, 천재적인 조형 능력을 겸비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관객이 아버지가 되어 저절로 불효자식을 끌어 안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감동적인 이그림은 렘브란트의 내면을
거울처럼 반영했다. 스타화가로 명성을 떨쳤던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생애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그림]Rembrandt◈Self-Portrait (1669)
그의 개성적인 화풍을 고객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그림주문이 끊겨서 파산을 했으며, 결국에는 빚더미에
앉았다. 가난뱅이가 된 그의 모습은 아들의 닳고 해진
옷차림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그래서 이런 가정을 해본다, 혹 렘브란트는 자신의 천재성을
짓밟는 무정한 사회를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이처럼 관용을
베푸는 그림을 그린것은 아닐까? 아니 용서가 있는 한
인간에게 희망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명옥/갤러리 사비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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