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여행의 추억/국내여행·마실

[2007년 3월] 섬진강봄나들이(매화마을-산수유마을-화엄사-화개장터)

인생멘토장인규 2007. 3. 26. 14:57
여행지
섬진강봄나들이(매화마을-산수유마을-화엄사-화개장터)
여행기간
2007.03.20(화)
나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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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스토리

바야흐로 봄이다. 봄의 전령사는 누가 머래도 꽃이 아닐까. 지난 꽃샘추위로 벚꽃은 아직 이르지만 하얀꽃들로 뒤덮힌 광양매화마을과 구례산수유마을을 찾았다.

▶ 매화축제: 3.17~3.25

▶ 산수유꽃축제: 3.15~3.18

오는 길에 구례화엄사와 하동 화개장터를 둘러오는 섬진강봄나들이는 참으로 상쾌한 여정이었다.  

  

◈ 광양 매화마을을 찾아서

 

●위    치 :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매화마을

지리산 자락을 수놓으며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면 매화나무가 지천으로 심어
져 있는 섬진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농가들은 산과 밭에 곡식 대신 모두 매화나무를 심어

매년  3월이 되면 하얗게 만개한 매화꽃이 마치 백설이 내린 듯, 또는 하얀 꽃구름이 골짜기에 내려앉은 듯 장관을 이룬다.  
  이곳의 맑고 온화한 강바람과 알맞게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매실농사에 적합해서 수확량도 한 부락에서 연간 100톤이 넘는다고 한다. 올매화인 이곳의  매화는 지리산 능선에 잔설이 희끗희끗하게 남아 있는 3월 초순 경부터 꽃망울을 터트리며, 매실 수확은 지리산 철쭉이 한창 피어나는 6월에 시작된다. 매실은 다른 꽃들이 겨울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꽃이 피고, 여름 벌레들이 극성을 부리기 전에 수확이 되어 농약이 필요 없는 청정과일이다. 
   매화나무 집단재배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청매실농원에는 1930년경 율산 김오천선생이 심은 70년생 고목 수백 그루를 포함하여 매화나무단지가 잘 조성되어 있으며,  매실
식품을 만드는데 쓰이는 전통옹기 2000여기가 농원 뒷편 왕대숲과 함께 분위기를 돋운다.
또한 농원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 재첩잡이 풍경도 일품이고, 매화꽃 피는 3월마다 '매화축제'가 열린다. 

청매실농원이야기

1931년 1대 매실농사꾼인 율산 김오천옹(홍쌍리여사의

시아버님)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며 일본땅에서의 고된

광부 생활로 모은 돈으로 매실나무, 밤나무등의 묘목을

마련해 고향으로 돌아와 나무심기에 평생을 바친 분으로

이 농원에 기반이 되시는 분이었다.

우리에게 매실명인으로 널리 알려진 경남 밀양태생의

홍쌍리 여사가 40여년 전 김선생댁에 시집와서 27ha의

농장을 청매실 농원으로 조성하였고 신념과 인내를 가지고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매실의 우위성을 발췌, 독보적

발상과 노력으로 오늘날의 식품으로까지 개발해 내어

매실을 각광받는 고부가가치의 농산물로 이르게 하였다.

 

김오천옹 기념비

청매실농원에는 청매가 재배면적의 약 80%를 점유하고 있으며, 품종으로는 백가하, 남고, 고성,

청축 등이 있고, 수분수가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매화 집단 재배를 전국에서 가장먼저 시작한 청매실농원에는 1930년 경 율산 김오천옹이 심어

놓은 고목 수백그루를 포함, 매화나무 단지가 잘 조성되어 있으며 매실식품을 만드는데 쓰이는

수백가의 옹기가 농원 뒷편 왕대숲과 함께 장관을 이루고 있다. 현재 청매실 농원에서는

다양한 매실제품을 연구, 개발, 생산, 판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실농원내 장독대,

매화산책로등 관광자원으로, 매실수확체험등 다양한 행사로 광양매화마을을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3대 매실농사꾼은 김민수(홍쌍리여사의 장남)로 본격적인 매실제품의 가공 판매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며 신제품개발, 홈페이지 구축 및 국내외 박람회, 전국지사등 다양하고 다각적인

홍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며 창의적인 사고와 진취적인 경영방식으로 매실식품 대중화에 앞장

서고 있다.

[자료: http://maehwa.invil.org/ ]


 

 ◈ 구례 산수유마을을 찾아서

 ●위   치 : 전남구례군산동면 상위마을 (지리산온천랜드일대)

봄기운에 겨운 섬진강의 짙은 물빛을 따라 861번 지방도로(전남쪽)를 따라 매화 향기를 맡으며 달리는 다압면 매화길은 드라이브자체로도 멋지다. 남도대교를 건너 91번 국도(경남쪽)를 따라 구례로 간다. 계속된 가뭄에 모래톱이 하얗게 넓어져 그 색깔이 진한 대비를 이루는 하동포구 칠십 리 길은 벚꽃길이지만 아직 벚꽃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아쉬었다.

 

 산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것은? 산수유나무다.
산수유나무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 사방천지는 그야말로 샛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풍경으로 변해 버린다.
산수유는 작가 윤대녕 씨가 '마른 가지에 뿌옇게 튀어 올라 비구니 애처로운 머리통에 비죽비죽 돋는 머리칼 끝들을 생각나게 한다' 던 바로 그 꽃이다.

  

구례군의 산수유는 전국생산량의 60%이상을 차지하는데 2월 중순부터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해 3월 중순경이면 노란색으로 만개되어 4월초까지 노오란 꽃물결의 대장관을 이루고, 10월 에는 진홍빛 산호를 깍아 놓은 듯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아, 풍성한 볼거리를 관광상품으로 안겨 주고 있으며, 인근에는 국내최대 규모인 지리산온천이 관광자원으로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산수유꽃이 필 무렵에는 지리산자락에서 나오는 고로쇠약수와 흑염소로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절호의 시기이므로 산수유꽃을 자연 관광상품화하여 국내·외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지역 주민들이 발의하여 1999년부터 산수유꽃축제를 개최하여 오고있다고 한다. 

구례 산수유 마을에 산수유를 심게된 유래가 재미나다.

  중국 산동성에 사는 처녀가 구례에 시집을 오면서 산수유씨를 가져다 심은것이 오늘날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이 되었고 산수유 2그루만 있으면 아이들 학비 걱정을 안해도 되는 효자 상품이 되었다. 산수유꽃은  하나하나 볼 때는 아름답다고 할수는 없으나 군락을 이루어 피기 때문에 마을전체가 노란 물감을 칠해놓은듯 아름답다.

 

 

 

◈ 구례 화엄사

전남 구례군 지리산 노고단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다하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고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가 또다시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 완성 하였다.
사찰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배치 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로 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金剛力士),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문은 금강문과는 서쪽방향으로 벗겨놓는데 독특한 특징이다. 지금은 일주문 사천왕문 등은 보수중에 있어 옆길로 가야만 했다.

지리산은 말이없고, 칠불도 또한 설함도 없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도 없으니,
무심이랴야 백운과 함께 하리라.

 

고창선운사동백이 유명하지만. 이곳 각황전뒤편에도 아름드리 동백나무로 둘러쌓여 있었다.

화엄사를 둘러보고 내려와 이곳에 오면 늘상 가곤했던 욕쟁이할머니집(그 옛날 산채식당)을

다시 찾았다.산채정식의 반찬가지수가 무려 30이 넘는 데다 할머니들의 손맛이 어우러져

참으로 맛있다.

고창선운사동백이 유명하지만. 이곳 각황전뒤편에도 아름드리 동백나무로 둘러쌓여 있었다.

화엄사를 둘러보고 내려와 이곳에 오면 늘상 가곤했던 욕쟁이할머니집(그 옛날 산채식당)을

다시 찾았다.산채정식의 반찬가지수가 무려 30이 넘는 데다 할머니들의 손맛이 어우러져

참으로 맛있다.

 

고창선운사동백이 유명하지만. 이곳 각황전뒤편에도 아름드리 동백나무로 둘러쌓여 있었다.

화엄사를 둘러보고 내려와 이곳에 오면 늘상 가곤했던 욕쟁이할머니집(그 옛날 산채식당)을

다시 찾았다.산채정식의 반찬가지수가 무려 30이 넘는 데다 할머니들의 손맛이 어우러져

참으로 맛있다.

[화엄사 볼거리]

  

●각황전(국보67호)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부르게 된 각황전.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넣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석등(국보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

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

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4사자삼층석탑(국보35호)

각황전좌측편으로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

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 화개장터

화엄사를 뒤로 하고 섬진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집으로 돌아오는 19번 국도는 환상의 드라이브길.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악양 평사리 무딤이들과 최참판댁이 좌측편에서 오라고 손짓하고, 곳곳엔 야생녹차 재배지가 유혹을 하는 곳이 바로 이 길이다.
  
화개장터는 화개면 탑리에 있으며 5일장이 활발하게이루어졌던 곳이다.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내려와서 섬진강과 만나는 곳에 자리한 화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중 하나로 전국의 어느 시장보다
많은 사람이 붐볐던 곳이다.이곳엔 5일장이 섰으며,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 더덕, 감자
등을 가지고 와서 팔고, 전라도 구례,경남 함양 등 내륙지방 사람들은 쌀보리를 가져와 팔았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이 장을 놓칠세라 생활용품을 가지고 왔으며, 또한 여수,
광양, 남해, 삼천포 충무, 거제 등지의 사람들은 뱃길을 이용하여 미역, 청각, 고등어 등
수산물을 가득 싣고와 이 화개장터에서 팔았다.
김동리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한 화개장터는 벚꽃길 따라 수많은 관광객이 지리산 쌍계사와
더불어 왕래하고 있으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도로변은 봄날이면 환상적인 벚꽃
터널을 이룬다.옛날 시골장터의 정취를 물씬 느낄수 있는 화개장터에는 국밥집, 도토리묵,
재첩국집, 주막, 엿장수, 산나물,녹차 등의 특산품 등이 있어 훈훈한 인심을 주고받는 만남과
화합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