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향기/身 言 書 判

이 남자들의 경쟁력

인생멘토장인규 2009. 6. 1. 08:55

 

소설가·번역가·신화연구가 이윤기
 
 
畵手 조영남 토크쇼 “무작정 만나러 갑니다”.17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중견 작가이자 탁월한 번역문학가이며, 신화연구가 이윤기(62)가 과천 자신의 집으로 조영남을 초대했다. 인터뷰보다 술이 고팠던 탓이다. 초저녁에 만난 둘은 새벽 5시까지 와인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화와 인간의 세계를 넘나드는 수다를 떨었다. 이윤기는 조영남 못지않은 입담을 선보였다.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면서 등단해 1998년 동인문학상과 2000년 다산문학상을 수상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중견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번역한 탁월한 번역문학가.

신들의 이야기를 마치 옆집에서 일어나는 일인 양 실감나게 묘사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권)로 인문서로서는 기록적인 180쇄를 찍은 신화연구가. 이런 화려한 이력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인문학자로 꼽히는 이윤기의 학력은, 그러나 고등학교 중퇴와 신학교 중퇴가 전부다.

경북중학교를 나와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3개월 만에 스스로 퇴학했다. 영화관 다니기를 좋아하고, 그 시절 이미 막걸리 마시기를 즐겼던 그에게 학교는 공부하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공부를 방해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학교라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뛰어내린 것을 자신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부한다.

학교를 나온 뒤 그는 독하게 독학으로 공부했다. 클래식 음악감상실에서 하루 종일 바흐·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헤밍웨이·오 헨리 등을 영어로 읽었다. 또 다자이 오사무·나쓰메 소세키 등은 중학교 3학년 때 공부해둔 일본어로 읽었다. 공부하다 코피가 나면 사전 모서리로 쓱 닦고 공부를 계속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 후 신학대학에 들어갔지만, 잠시 다니다 또 그만뒀다. 영장이 나와 군대에 갔고, 1971년에는 월남전에 참전해 훈장도 받았다. 제대 후 공사판을 전전하던 그는 1975년 <학원>지의 기자가 됐고, 그곳에서 미술 전공 편집기자를 하던 아내를 만났다. 서른 살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번역 일을 시작했다.

그는 “번역을 하며 글쓰기를 배웠고, 그러면서 신화를 만났다”고 말한다. 이렇게 소설가이자 번역가, 신화연구가로서의 인생은 시작됐다. 조영남과 이윤기의 만남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영남이 서울대 음대생이던 시절 재수생이던 이윤기와 잠시 마주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굳어진 ‘형님-동생’ 관계를 이윤기는 지금까지도 끔찍이 지킨다. 단, 단둘이 만났을 때만이다. 십 수년 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의 소개로 둘이 다시 만났을 때 겉보기로는 이윤기가 훨씬 오래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둘이 있을 때는 조영남이 형이지만, 방송국 등에서 만났을 때는 이윤기가 형을 먹기로” 약속했다.

<월간중앙>인터뷰를 빙자해 오랜만에 형님을 만나게 돼 하루 종일 설레었다는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학자는 대문 밖에 서서 조영남을 반겼다.

이윤기 어서 오세요. 형님이 초인종을 누르게 할 수 없어 집 앞에서 1시간을 기다렸어요.

조영남 (깜짝 놀라) 아니, 왜 나와 있어?

이윤기 저는 후배가 오면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기다려요. 하지만 선배가 온다면 초인종을 누르게 하면 안 되죠. 동생이 밖으로 마중나와야지.

조영남 우와. 멋지다.

이윤기 그런데 제가 왜 인터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제가 요즘 이슈가 없잖아요? 얼마 전에는 계간지 소설도 ‘펑크’ 냈고, 또 최근에는 제가 못 듣는 것이 심해졌어요. 요즘에는 술도 안 마시는데 그러네.

조영남 그러냐? 오늘 인터뷰는 말이야. 최근 내 친구들이 자꾸 죽고 있거든. 얼마 전에도 장영희 교수가 죽었잖아? 사진 한번 같이 못 찍고 그렇게 된 것이 영 마음에 걸려서 산 친구들 찾아 한 판씩 찍어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자네를 찾아 왔어.

 

이윤기 그렇지 않아도 김점선 화백과 장영희 교수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고, 선배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 상심이 크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형님을 만나면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형님이 좋아하는 ‘플렉서스’ 있잖아요? 얼마 전 미술사를 찾아 봤더니 그게 미술사의 한 흐름이더구먼. 내가 그동안 플렉서스를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최근에야 조지프 보이스에 대해 읽고 조금 감을 잡았는데…. 나한테 아직 마르셸 뒤상은 수수께끼에요.

조영남 수수께끼?

이윤기 르네 마그리트는 좀 알겠는데, 마르셸 뒤상은 영…. 예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조지프 보이스의 전시를 본 적이 있거든요. 조지프 보이스와 로댕 2인전이었는데, 나는 아직도 왜 그 둘을 함께 전시했는지 모르겠어요.

글쓰기가 두려워졌다

조영남 흠…. 내가 판단하기에는 정통과 비정통의 어마어마한 대비지. 로댕은 정통파의 대표이고, 조지프 보이스는 미술에 정통이 어디 있냐고 대든 사람이잖아.

이윤기 아! 그러니까 이해가 간다. 나는 미술은 피카소 이전까지만, 음악은 드뷔시 이전까지만 이해가 되거든요. 그 뒤로는 영….

조영남 하하. 참 이 인터뷰는 말이야, 원래 내가 존댓말을 쓰면서 정식으로 인터뷰해야 하는데 나도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냥 생긴 대로 하자.

이윤기 그럼요. 형님이 갑자기 저한테 존댓말을 하면 근지러워서 어디 제가 말할 수 있겠어요? (와인을 따르며) 독일 괴테하우스에서 고은 선생님의 시 낭독이 있었는데, 그때 고은 선생님께서 커다란 잔에 포도주를 따라 마시면서 하시더라고요. 그때 그 여유가 어찌나 부러웠던지….

조영남 너는 와인 맛을 좀 아냐? 선호하는 주종이 따로 있어?

이윤기 사실 저는 위스키가 제일 맛있어요. 그런데 위스키는 집에서 금지당해 이제 못 마시고, 와인은 좀 편하게 마시게 하는데….

조영남 역시 독주가 맛있지? 나도 와인 맛은 모르겠어. 꼭 말오줌 맛 같아.

이윤기 (박장대소하며) 나는 쉰 막걸리를 마시는 것 같아. 나는 와인 관련 만화책을 한 열 권 읽었어요. 그래서 내가 상당히 와인에 친화력이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와인보다 소주가 더 좋아요.

조영남 너 예전에는 하루에 10시간씩 글을 썼잖아? 요즘에는 몇 시간까지 써?

이윤기 요새는 그렇게 많이 못 써요.

조영남 그렇지? 체력이 안 되지?

이윤기 체력이 줄기도 했지만, 글 쓰는 것에 대해 망설임도 많이 생겼어요. 전에는 막 썼는데, 지금은 그렇게 못해요. 옛날에 막 썼던 것에 대한 반성 때문에 무지하게 많이 조심해요.

조영남 욕심이 줄어든 것인가?

이윤기 말하자면 그렇죠. 이제 양으로 승부할 수는 없다고나 할까? 꼭 필요할 때만 한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요즘 모든 청탁을 거절하고, 모든 인터뷰도 사절하죠. 신문 기고나 방송 출연도 완전히 없어진 상태인데, 오늘 형님을 왜 오시라고 했느냐 하면, 형님과 술 한잔 할 욕심이었어요. 제가 이도 빠지고, 귀도 잘 안 들려서 요즘 일절 사람을 안 만나요. 만나기가 싫죠. 그래서 형님을 초대한 것인데, 내가 소주 5병을 가져오라는 것을 형님이 2병으로 줄이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조영남 알았다, 알았어. 번역과 창작은, 창작과 번역은 뭐가 같고 어떤 면이 다른가? 그건 우리나라에서 이윤기가 거의 유일하게 대답할 수 있는 입장이란 말이야.

이윤기 이윤기도 대답할 수 있지만, 세상 떠난 장영희도 대답할 수 있었을 거예요. 사실 그 두 가지가 하나예요. 두 개가 아니고. 내가 영어 텍스트나 희랍어 텍스트를 읽으면 그 언어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한국어로 번역돼 이해해요.

조영남 읽으면서?

이윤기 그렇죠. 저는 일본어나 영어는 거의 우리말처럼 읽고 다루는데도 그 말을 읽으면 순간 한국말로 전부 받아들여요. 둘째는, 창작을 가르쳐 주는 학교는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쓰는지 주시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제가 1988년까지 번역한 책이 200권이 넘습니다. 그 이후로는 세는 것이 의미가 없어져 안 세죠. 도대체 외국에서 내로라 하는 작가들의 작법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사람을 속여먹는지를 저는 열심히 번역하면서 익혔죠.

조영남 나는 이 시대의 위대한 작가를 꼽으라면 움베르토 에코를 꼽거든. 그런데 자네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번역했다 이 말이야. 움베르토 에코의 글을 번역하며 그의 작법을 마스터했다고 자부하나? 아니면, 에코는 에코고 이윤기는 이윤기인가?

이윤기 저는 움베르토 에코가 위대한 소설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움베르토 에코는 지적 허영으로 가득 찬 작가예요. 그 지적 허영 때문에 번역가인 내가 반 죽었었죠. 내가 중세 학자도 아닌데 중세를 이야기하고, 라틴어·희랍어 등 온갖 언어를 다 동원해 말장난을 하는데, 와우…. 에코는 거의 천재예요. 천재의 작품을 둔재인 내가 번역하려니 내가 그 책을 몇 번이나 집어 던졌겠어요? 내가 움베르토 에코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셌어요.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여덟 권이나 번역했거든. 그 지적 허영을 과시하는 책을…. 제가 볼 때, 위대한 작가는 헤밍웨이 같은 작가예요. <노인과 바다>를 봐요.

조영남 아하. 내가 평생 움베르토 에코에게 기가 죽어 나는 결코 위대한 글을 못 쓰겠구나 생각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구나.

이윤기 전혀 없죠. 형님이 왜 피카소 같은 그림을 못 그린다고 미리 정해버려요? 그런 것은 단지 타인의 취향일 뿐이죠. 움베르토 에코가 천재인 것은 맞지만, 그런 지적 허영에 찬 글을 쓰는 것은 그의 취향이지 내 취향은 아니라는 것이죠. 한번은 방송에서 움베르토 에코와 저의 대담을 붙이려고 했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움베르토 에코와 대담 거절

조영남 왜?

이윤기 모르는 것이 없고, 세상의 모든 핵심을 다 꿰뚫는 볼로냐대학 교수와 제가 왜 붙어요? 또 그 앞에서 내가 아무리 영어를 해봤자 되겠어요? 뻔히 촌놈이 될 짓을 뭣하러 해요? 또 저하고는 취향이 안 맞아요.

조영남 그럼 그 사람 책은 왜 그렇게 많이 번역한 거야?

이윤기 그 책을 들여다보니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겠더라고. <장미의 이름> <전날의 섬> <푸코의 진자>에 9개국 언어가 등장합니다. 마침 <푸코의 진자>는 미국에 있을 때 번역했는데, 제가 살던 교환교수 아파트에 107개국 학자가 살았어요. 세계 어떤 언어든 요즘 말로 들이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어떤 번역가가 미국 교환교수 아파트에 가서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책을 내고 나서 많이 깨졌어요. 하지만 어차피 누가 해도 깨지는 거라고 생각했죠. 번역은 분업이 아니라는 말예요. 분업으로 하면 라틴어 하는 사람, 그리스말 하는 사람, 중세 독일어와 중세 프랑스어 하는 사람이 나눠 하면 되는데, 그러면 이게 예술이 아니죠. 그래서 제가 그때 한 결심이 ‘좋다, 깨지자. 깨지는 대신 에코의 향기는 내가 살린다’였습니다.

조영남 네게 에코가 먼저였냐, 그리스·로마 신화가 먼저였냐? 순서가 어떻게 돼?

이윤기 그리스·로마 신화가 먼저죠.

조영남 그럼, 그리스·로마 신화의 무엇이 이윤기를 잡았어? 어떤 상태에서?

이윤기 제가 미술사에 관심이 많아서 어려서부터 서양미술사를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서양미술사를 쭉 보면 그리스적인 것과 로마적인 것 딱 두 개예요. 그 다음에는 히브리적. 그러니까 그리스·로마는 그레코로망이고, 헤브라이즘이 있는 것이죠. 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모르면 유럽문화는 전혀 모르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영남 그럼 신화는?

이윤기 그리스·로마 신화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원류죠. 예를 들어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화집을 보면 그리스·로마 신화와 헬레니즘을 빼버리고 나면 자화상 한 작품밖에 안 남아요. 17~19세기 유럽 문화는 거대한 헬레니즘 문화와 헤브라이즘 문화의 용광로였던 거죠. 니콜라 푸생이라는 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프랑스 화가면서도 로마유학을 했어요. 거의 대부분 로마에서 보냈죠. 프랑스가 지금도 유럽 문화에서 주류 행세를 하는 이유는 순전히 니콜라 푸생 때문이에요. 푸생이 헬레니즘 기운을 프랑스 미술에 막 불어 넣었거든요. 그 100년 후쯤 태어난 사람이 나폴레옹이고요.


조영남 신화와 나폴레옹이 연결된다는 말이야?

이윤기 그럼요. 나폴레옹은 고트족을 완전히 로마의 계승자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잖아요? 심지어 그리스·로마 문화뿐 아니라 이집트 문화까지 자기들의 원류로 만들어 버렸잖아요? 샹젤리제의 콩코드광장에 오벨리스크 갖다 세워 놓고. 그러니까 그리스·로마 신화와 연결이 안 될 수 없죠. 예수의 생애를 모르면 루브르박물관에 가봤자 헛것이잖아요?그런데 그리스·로마 신화를 알고, 헤브라이즘 성경문화를 알고 루브르에 가면 ‘저것은 홀로 페르네스의 목을 쳐버린 유디트구나’가 되고, 그 문화가 비로소 우리 것이 되죠.

조영남 그럼 당신은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경, 우리의 <삼국유사>를 다 같은 책으로 보나?

이윤기 그거 굉장히 중요한데, 함부로 말하기가 겁나는 질문이네요. 신화는 목숨 끊어진 종교의 경전입니다. 옛날에는 경전이었어요.

조영남 성경은?

이윤기 성경은 살아있는 경전이고요.

조영남 그럼 <삼국유사>는 목숨 꺼졌다 이장해 불에 타 없어져버린 경전인가?

이윤기 <삼국유사>는 애초에 완전히 종교적으로 만든 거예요. 일연이라는 스님이 되도록이면 불교에 가깝게 하기 위해 불교 이야기를 무지하게 녹여 쓴 책이거든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삼국유사>가 쓰여진 것이 14세기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리스 신화가 처음 쓰여진 것은 BC 8세기고요. 2,800년 전에 쓰여진 것이죠.

조영남 우와. 공자보다 500년 전이네? 공자보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훨씬 멀구나.

이윤기 그렇죠. 그때 이미 수십 만 단어의 <호메로스>가 이미 쓰여져 있던 거예요.

조영남 성경은 하나님이 썼다고 사람들이 우기는데, 그러면 그리스·로마 신화는 누가 옮겨 적은 거야?

이윤기 잘 모르겠어요. 구전하는 이야기를 적은 것 같은데….

조영남 아니 내 말은 결국 구전되던 이야기를 누가 옮겼냐는 것이지.

이윤기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 것이 좋아요. 살아있는 경전을 뭐라고 하면 서로 감정만 상하니까. 성경을 신화라고 하면 기독교인들이 발끈 화를 낼 거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 화를 낼 이유가 없어요. 신화는 신의 이야기잖아요? 우리가 유일신 야훼를 말하는 건데, 신화라는 말을 왜 쓰면 안 돼요? 신의 이야기잖아요, 하나님의 이야기….

조영남 예전에 노무현 씨가 탄핵당할 당시 당신이 “아차, 사람들이 노무현을 영웅으로 만드는구나”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이야.

이윤기 아~. 영웅은 박해받으면서 상승하기 시작하거든요. 탄핵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가 집사람한테 “어, 입질 왔다. 이거 입질 크다”고 말했거든요. 만약, 그때 그냥 선거를 했으면 민주당이 40~50석밖에 못 얻을 전망이 뚜렷했어요. 그런데 국회에서 탄핵당한 거예요. 나는 영웅신화를 잘 안단 말이에요. 나는 인간의 구조를 조금 안다는 얘기죠. 이거 큰 거 물었다, 총선에서 적어도 140석은 넘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한 인간을 때려 눕혀 놓고 국민이 울먹이잖아요. 그렇죠? 그러고는 그 인간을 다시 세워놨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 저렇게 된 이유는 탄핵이 계속 왔어야 하는데, 그래야 그 사람이 살아 움직이고 영웅이 됐는데, 그렇지 않아서 저렇게 된 거예요. 계속 견제할 세력이 없어서 저렇게 무너진 것이죠.

조영남 그러니까. 영웅 중에서는 짧은 영웅이 있고 긴 영웅이 있고…. 모든 영웅이 저렇게 비참하지는 않을 텐데.

이윤기 조지프 켐벨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한 말이 “모든 영웅은 오늘 순교자가 되지 않으면 내일 참살당한다”입니다.

조영남 이야, 멋진 말이다.

이윤기 순교자가 되면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고, 순교자가 못되면 까불다 ‘죽는다’는 것이죠. 제가 영웅 신화를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상승과 하강이 영웅 신화의 눈으로 보면 보이거든요. 제가 미술사에 대한 책도 집필하고, 한때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어요. 하지만 미술이나 음악평론에 대해 일절 말을 안 하는 이유가 까불면 죽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런 활동을 자제하죠.

조영남 그런데 예외가 있어.

이윤기 당연하겠죠. 예외 없는 룰은 없으니까요.

조영남 그 예외가 바로 네 옆에 있는 사람인데. 나는 그렇게 숱하게 까불었는데도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야!

이윤기 하하. 지금까지 많이 죽지 않았나? 그런데 그게 형님한테는 약이에요. 이따금 한 번씩 ‘안티’가 생기고, 공격당하고 하는 것이…. 절대 나쁜 거 아니에요. 저는 극단적 우월감과 극단적 열등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에요. 최근에는 극단적 열등감이 생겼는데, 그 이유가 계간지 소설을 펑크내서예요. 왜 펑크냈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조영남 옳지.

이윤기 또 사람들을 놀라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 쓰는 데 힘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게 확 풀어지면 부드럽게 써질 텐데, 그게 안 풀어져서 결국 소설을 못 쓰고 말았어요. 그래서 요즘 완전 두문불출하고 있죠.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역풍 필요

조영남 최근 김점선과 장영희가 세상 떠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해낸 것인데, 우리한테는 육체로 들어오는 암이 있듯 생각의 암이 있는 것 같아. 이 생각의 암이 위장암이나 유방암·췌장암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지. 네가 지금 중압감을 느껴 글이 안 써진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생각의 암이야. 누구나 콤플렉스가 있는데, 그걸 넘나들지 못하면 생각의 암에 걸리고, 그것이 결국 아래로 내려가 몸을 망가뜨린다고.

이윤기 맞아요. 그런데 나는 조영남 형님을 보면 최고로 복을 받은 사람 같아. 목소리가 시원찮은 사람은 아무리 연습해도 <딜라일라>가 안 나오거든요. 천품이 받쳐 주니 되는 것이지. 나는 독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형님은 옆에서 가만히 보면 독하게 공부하는 스타일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무대에 세워 놓으면 무대를 잡고 흔든다 이 말이야. 그것은 천품이 아니면 안 돼요. 천품이 없으면 ‘가요무대’나 나오다 사라지지. 내가 최근까지 <샘터>에 실린 장영희 교수의 글을 꼼꼼히 봤는데, 그분한테도 아버지의 부담이 상당했던 것 같아요. 그 스트레스가 심했어. 신문에 쓰는 글도 열심히 읽었는데,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쓰는 일이 없어요.

조영남 맞아. 그 아버지가 유명한 번역가이신 장왕록 서울대 교수셨잖아? 나는 장영희의 그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문장을 생각의 암으로 본 것이지.

이윤기 그럴 수도 있겠다.

조영남 김점선도 죽을 때까지 그림을 한 점도 안 팔고 집에 쌓아뒀어. 컴퓨터로 그린 말도 안 되는 싸구려 그림만 팔아 생활하다 죽었지. 그것도 생각의 암이야. 식자한테, 그리고 연예인들한테 가장 치명적 병이지. 그래서 자살하는 거잖아? 자살은 몸이 아파 죽는 게 아니라 생각이 아파서, 생각이 더 이상 자기를 견딜 수 없을 때 죽는 거지. 우리는 이 생각의 암을 조심해야 한다고.

이윤기 (인터뷰 내내 옆에 동석하고 있던 부인을 향해) 여보, 앞으로는 내가 공부 안 해도 닦달하지 말아. 그런데 내가 이번에 소설을 못 쓰면서도 지키고자 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절대 역사로는 안 간다는 거예요. 역사는 소설가에게 은둔처예요. 이미 텍스트가 있으니까. 또 하나는, 절대 <삼국지>로는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연을 개척해야 하는데 <삼국지>는 내연이지 외연이 아니거든요. 제가 <그리스로마 신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바깥에 있던 것을 우리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거든요. 이번에 역사 속 인물을 다루고 싶었으나 혀를 깨물고 참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요즘 소설가들이 역사인물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저는 심정이 안 좋아요. 왜 지금(now), 여기(here)에 있는 현상과 싸우지 않고 역사로 도피하려고 하는지.

조영남 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하느냐는 것이구나. 음악세계로 치면 작곡은 하지 않고 변주(variation)만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이윤기 미국 대학 도서관에 장자 연구서가 300권이 넘어요. 노자 연구서가 또 300권이 넘고요. 처음에는 이것들을 쭉 읽다, 어느 순간 이걸 읽어서 뭣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미시간대 연구교수를 마치고 시카고대로 종교학 박사를 가려고 했던 때인데, 그때 손을 털었죠. 더 이상 공부 안 하고 소설 쓰겠다고…. 나는 베리에이션(variation)이 아니라 텍스트(text)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모름지기 작가는 텍스트를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기형도만 해도 기형도에 관한 평론이 얼마나 많아요. 석·박사논문은 또 얼마나 많고…. 그런데 어느 누구도 기형도 평론을 읽고 감동받지는 않거든요. 기형도의 <빈집> 시를 읽고 감동을 먹지. 그것이 텍스트의 힘이죠. 또 하나, 저는 요즘 죽은 사람의 말은 되도록 인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죽은 사람이 남긴 말은 명성이 말의 진정성을 넘어서는 것 같아서죠. 되도록이면 내 말로 쓰려고 하죠.

조영남 네가 수없이 많은 사랑 이야기를 번역했을 텐데 이윤기의 사랑은 뭐냐? 한번 들어보자. 힘든 질문이지? 한 여자하고 산 남자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게 웃기기는 하지.

이윤기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랑의 경우를 책으로 읽었죠.

조영남 책으로만 읽었지?



이윤기 그럼 책으로만 읽지. 뭔 벼락을 맞으려고. 집사람을 만나 32세에 결혼했으니…. 그 전에 물론 다른 여자를 만나보기는 했지만, 나한테 맞지 않는 옷으로 느껴졌죠. 그런데 나는 내 아내와 만나 결혼하고서는 우리는 서로의 옷인 거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예요. 내가 갈라져 둘이 되어 버린…. 그러니까 집사람과 내가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내가 분화해서 반은 저 사람 안에 있는 거예요. 또 집사람 몸의 반이 분화해 내 속에 있는 것이고요. 저는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이 둘이 분열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조영남 내가 보기에는 네가 변태인데. 어떻게 내 반이 한 여자에게 들어가냐? 나는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야. 아무튼, 나는 네가 번역한 책 중에 내가 극히 좋아했던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야. 그 책에 따르면 인간이 곧 두 가지 성향으로 살아간다는 것이거든. 쉽게 말하면 이윤기처럼 살 수도 있고, 조영남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책의 묘미는 이윤기처럼 사는 놈이 조영남처럼 사는 거를 부러워하는 거야.

이윤기 나는 안 부러워하는데.

조영남 사실 또 그 책에서는 조영남처럼 사는 것을 지향하고.

이윤기 그런데 그것에 대해 형님과 내가 얘기하면 지금쯤 막 부닥치는데….

조영남 어차피 우리는 만날 싸우잖아.

이윤기 세상에는 천품의 은혜를 받은 사람과, 천품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장자가 한 말 중 ‘취이예지불가장보(而銳之, 不可長保)’라는 말이 있어요. 가는 것은 좋은데, 너무 많이 갈아버리면 오래 간직할 수 없다는 말이죠. 갈긴 갈아야 하는데 갈 재능이 있어야죠. 그런데 형은 갈 재능이 있다 이 말이야. 예를 들어 조금만 노력하면 김세환 같은 목소리는 만들어낼 수 있지만, 조영남·조수미·신영옥의 목소리는 천품이거든. 갈아서 될 일이 아니지. 천품이 허락한 재능을 갖고 너무 뻐기지 말아요. 저는 20만 원 원고료 글을 하나 쓰기 위해 책 스무 권을 읽을 때도 있어요. 천품이 없는 사람은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천품을 타고난 형은 무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그냥 되잖아요? 그런데도 천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영남 그건 한 측면의 이야기지. 네 말대로 천품을 타고난 조수미나 신영옥이 얼마나 열심히 뒤에서 노력하는 줄 알아? 내 생각에 조수미나 신영옥은 천품이 아니라 엄청나게 갈고 닦은 결과라고. 갈고 닦지 않으면 천품을 바랄 수 없어.

이윤기 참, 형님. 요즘 골프 몇 타나 쳐요? 싱글 치나?

조영남 나는 요즘 스코어를 점검하면서 치지 않아서…. 한 90타 정도 되려나?

이윤기 미국에 있을 때, 연습장에서 10만 개 이상 쳤거든. 완전히 교본 그대로 치지. 그래서 요즘 잠이 안 오면 ‘영남이형이랑 한번 붙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나는 지금도 80타 안으로 칠 자신이 있거든요. 내가 지금까지 남들과는 한 번도 안 쳐 봤는데, 이제는 소설이나 산화로는 더 이상 세상을 놀라게 할 것도 없는데 ‘이윤기 첫 판에 싱글 올리다’로 세상을 놀라게 해줄까 싶어요. 내가 첫 라운딩에서 80타 안으로 들어오면 완전히 뉴스잖아?

조영남 여태껏 연습만 한 거야? 이 사람은 한 여자와 30년 산 것 빼고 나머지는 다 변태야. 재미있다. 너는 인간의 성숙(grow)을 믿냐? 나는 인간의 성숙을 믿지 않거든. 골프장에 가보면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초등학교 5학년생보다 못한 인격을 보일 때가 많거든. 내가 볼 때 인간은 결코 성숙하지 않아. 그런 척하는 거지.

이윤기 무지하게 어려운데. 저는 인간이 성숙하다 어느 순간 멈추는 것 같아요. 저는 골프를 연습만 하고 막상 필드에 안 나가는 이유가, 그런 사람들하고 6시간 라운딩을 같이해야 하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이에요. 그건 악몽이지.

조영남 나랑 한번 같이 가자.

이윤기 그래요. 참, 형. 이슬람 말 중에 “알라를 경배하라. 그러나 알라에게 너무 사랑받지는 말아라. 빨리 죽는다”는 말이 있어요. 신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는 거를 그리스 말로 ‘데오필로스’라고 해요. 라틴어로는 ‘아마데우스’고. 모차르트의 중간 이름이죠. 영어로는 ‘데오필로’. 데오필로가 되면 빨리 죽는다는 거예요.

조영남 하나님이 사랑하니, 너 빨리 와라?

이윤기 그렇죠.

조영남 너나 나는 여태 살아 있는 거 보면 하나님이 별로 안 좋아하나? 별로 사랑하지 않는 거냐?

이윤기 그런가 봐. 아무튼,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웃고 떠드세요. 인생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조영남 그럼!

 

 

월간중앙 2009/ 6월호에서 펌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