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유/사색의 공간[감동·좋은글]

[웰빙에세이] 첫키스처럼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9. 13:44

 

몇 시간 산을 타다가 내려와 걸치는 동동주 한잔, 그 맛때문에 산에 간다는 사람도 있다. 한 여름 축구 한판 뛰고 생맥주 한잔을 들이킬 때도, 한 겨울 동네 한바퀴 돌다가 사우나 온탕에 풍덩 들어갈 때도 역시 "이맛이야!"란 말이 절로 나온다.

어디 이뿐인가. 빈속에 털어 넣은 소주 한잔이 찌르르하고 흘러 내려갈 때도 "캬∼"하는 감탄사가 터진다. 그와 함께 그날의 시름도 녹아내린다. 1000원짜리 김밥 한줄도, 2000원짜리 라면 한그릇도 상황에 따라 최고의 메뉴가 될 수 있다.

그 상황이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첫 맛이 최고에 이를 정도로 속을 비우는 것이다. 영화 '식객'에도 나오지 않는가. 가장 맛있는 라면의 비결은 배고플 때 먹는 것이라고. 군대 시절, 기합 세게 받고 보초 한참 서다가 들어와 눈치보며 끊여 먹던 라면의 맛을 어찌 잊을까.

점심을 거르고, 저녁을 즉석 김밥 한줄로 때워 보라. 김밥 한줄이 아니라 한 조각이 애틋하고, 단무지 하나 남길 게 없다. 그 아쉬움을 채우지 말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 식탁에 앉아보라. 그 아침이 얼마나 맛있겠는가.

첫키스가 아찔 할 정도로 짜릿한 것도, 첫 사랑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 것도 모두 같은 이치다. 하지만 어쩌랴. 첫키스든, 첫사랑이든 단 한번밖에 기회가 없는 것을. 그것이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면 방법은 단 하나 모든 키스를 첫키스처럼, 모든 사랑을 첫사랑처럼 하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글귀처럼, 그 글귀를 귀신같이 상표로 낚아 챈 술 이름처럼 말 그대로 '처음처럼'이다.

그런데 그 '처음처럼'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유는 역시 간단하다. 첫 맛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속을 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빈 속을 참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꾸역꾸역 채워 넣기만 하지, 비우는 훈련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채우고 또 채우니 진수성찬도, 산해진미도 입에 당기지 않는다. 1인당 10만원이 넘는 코스 요리에 역시 10만원이 넘는 고급 와인을 곁들여 뻐근하게 식사를 해도 감동이 없다. 로열살루트나 발렌타인 30년산으로 폭탄을 만들어 마셔도 "캬∼"하던 소주 한잔만 못하다.

끝없이 "조금만 더∼"를 외치는 욕망의 질주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더 맛있는 걸로, 더 비싼 걸로 쉬지 않고 업그레이드 해도 도무지 첫 맛이 나오지 않는다. 욕망의 한계효용은 채우면 채울수록 체감한다. 그걸 무시하고 자꾸 채우면 중독이 되고, 비만이 되고, 병이 된다.

그러니 비웠다가 채우고, 다시 비웠다가 채우는 식의 '처음처럼' 전략이 훨신 쉽고 안전하고 경제적이다. 그 비우는 전략을 실행하는 힘이 바로 나를 지키고 가꾸는 힘이기도 하다.

그 힘이 나의 하루를 생동하게 만든다. 첫 맛을 만나기 위해 나를 비우는 과정 자체가 생활의 질서로 자리 잡는다. 그것이 매 순간순간 생명에 힘을 불어 넣는다. 수 많은 '처음'을 만들어 낸다.

그것만이 아니다. 매 순간을 더 깊고, 더 크고, 더 넓게 만든다. 첫사랑보다 더 깊고, 더 크고, 더 넓은 사랑으로 나를 이끈다. 이 사람에게 싫증이 나면 다른 사람으로 바꿔 인스턴트 사랑을 반복하는게 '처음처럼'은 아니다. 진짜 '처음처럼'은 나를 비우고 규율하는 깊는 성찰에서만 나온다.

  ☞웰빙노트

글 쓴 시간보다 생각한 시간이 더 많고 말로 떠든 시간보다 오래오래 책을 읽은 시간이 몇십 배 더 많던 날들은 절절한 시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유한 시간보다 글 쓴 시간이 더 많고, 공부한 시간보다 강의한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는 제대로 된 시를 쓰지 못하였습니다. 한 말 또 하고 한 이야기 또 하면서 밥 벌어먹었습니다.
<도종환,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행복으로 가는 길은 지름길도 없으며, 일상의 현실을 슬쩍 비켜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을 통과해 간다. 게다가 우리는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대단한 비용을 들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이 순간-지금 그리고 여기에서-우리 주변의 작은 일들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면 되는 것이다. 새들이 앉아 있는 나무, 먼 바다, 폭풍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된다.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것은 일종의 선물이다.
행복이 우리 발 앞에 있다. 우리가 매일 걸어가는 길가에서 행복은 자란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꺾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지나쳐버리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한다. 행복을 예언하는 자들이 초대하는 장소에 갈지라도 말이다. 살면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을 통해 신을 보고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을 볼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영혼의 깊숙한 바닥에 행복이 살고 있다. 그곳에 바로 신이 머물고 있으며,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진다.
<알젤름 그륀,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흔히 계율은 그릇과 같고, 선정은 물과 같으며, 지혜는 달에 비유한다. 깨진 그릇에는 물을 담을 수 없다. 그릇이 성해야 거기에 선정의 물의 고이고, 그 물에 지혜의 달이 비친다. 그러므로 계율과 선정과 지혜는 누구나 마땅히 배울 것이라고 해서 '삼학'(三學)이라 한다. 청정한 생활 규범인 계행이 없으면 결코 선정을 이룰 수 없고,선정을 닦지 않고는 심성의 빛인 지혜가 나올 수 없다.<법정, 물소리 바람소리>
 
사무치는 뼛속의 추위를 겪지 않고서 코를 쏘는 매화 향기를 어찌 맡겠는가.
<장휘옥 김사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

 

[머니투데이 : 김영권 정보과학부장겸 특집기획부장]

 

2008-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