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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와 잔느 - 첫번째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1. 21:42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Female Nude(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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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밖에 없는 화가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

    역사상 가장 잘 생긴 화가"라는 평을 듣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남 화가와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 잔느 에뷰테른

    35세란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비극적인 인생을 마감한 모딜리아니만큼
    인생이 미화되고 전설화된 작가도 드물다.

    모딜리아니를 따라 오층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만삭의 임신부
    잔느 에뷰테른 (Jeanne Hebuterne)의 순애보도 신화적 전설에 기여했겠지만,
    화가가 죽고난 다음에야 그의 작품의 진가가 비로소 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는 선천적으로 병약했다. 조각을 하고 싶었으나 체력적으로나
    지나치게 비싼 재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술적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생전에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Red Nude (Nude on a Cushion)(1917)




    모딜리아니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1884년 7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다.
    소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성적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에 폐결핵까지 앓았다.
    이 때에 앓은 결핵이 파리의 보헤미안 시절에
    재발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본격적인 미술수업은 1898년 리브른느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누드화에 특히 재능을 보인 그는 1902년 5월 7일 피렌체에 가서
    아예 스콜라 디누도(누드학교)에 등록했다. 여기서 그는 누드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마르미지아노의 그림에 심취했다.

    1903년 3월에 모디는 베니스로 옮겨 같은 계통의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명한 미래파의 아르덴고 소피치와
    움베르도 보치오니 같은 동료화가도 만났다.


    남쪽의 태양과 예술을 찾아 온 북구의 처녀들을 사귀면서
    젊은 카사노바 같은 절제 없는 생활도 향유했다.
    후에 베니스에서 배운 습성, 티치아노와 지오르지오네의
    나체화들이 그의 삶과작품에 큰 영향을 준다.

    1905년 돈을 대주던 외삼촌 아메데오 가르씨니가 죽자,
    모딜리아니는 현대화의 메카인 파리로 향한다.
    몽마르트에서의 모딜리아니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Nude with Hat (1907-8)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림은 희귀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리베라, 소련에서 온 수틴, 자크 립시츠, 키슬링,
    막스 자콥과 주로 어울려 다녔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캔버스의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도 절약했던 때였다.

    1908년에 완성한 Nude with Hat는 절망과 불안, 성적 충동과 갈망으로
    초조한 화가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 ◈ Blonde Nude (1917)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삶 속에서 명멸해 갔다.
    모딜리아니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룻밤의 고독과 자살 충동을 이기기 위해 소모품처럼 써버린
    많은 요정들이 그의 예술혼과 끈끈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대개의 그 여성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익명으로 존재하며
    과장된 풍만함으로 여성성의 일부만을 강조해 표현되어 있다.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짓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그림]Amedeo Modigliani ◈ Madame Pompador  (1915)




    이그림은 실제 퐁파두르 부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베아트리체를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베아트리체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
    하며 타일렀으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딜리아니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
    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데 틀림없다.
    여하튼 이 때에 그린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Seated Nude (1917)





    Seated Nude는 잔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의 모딜리아니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단아하고 깊은 우수에 찬 눈을 갖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없이 아름답지만 슬픈 그녀의 표정을 우리는 놓칠 수 없다.
    앙다문 입에서조차 의지를 읽기보다는 세상을 관조하며
    마주앉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깊은 눈으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여성의 육신에 강한 오렌지색을 사용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식욕을 강하게 작동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다.



"계속"


 


 

2006-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