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카미유 클로델에 비유되는 프리다 칼로는
20세기 초반의 미술사, 격동의 현대사를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며 남편이었던 멕시코의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속에서 서로 예술적 영감을
주고 받는 동지로서, 때론 애증과 상처를 안기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장본인이었다.
프리다 칼로는 그림과 사랑으로 불꽃같은 삶을 태워
돌아선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아름다운
자화상을 그린다. 그 그림을 보고 다시 매혹되어 돌아오라고...
부드러운 담비털로 된 붓으로 병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자.
슬프면 슬픈 색깔로 장엄하게,
아프면 아픔 자체로 화려하게 환상을 만들어간 여자,
현실을 팽게대면서 비굴해지려는
인간들에게 독침을 찌르는 여자,
그 무엇이 우리를 장엄치 못하게 하는가?
저주 같은 불행을 받으면서도
자기 길을 화려하게 간 이 사람을 보라!
[그림]Frida Kahlo(1907 ~ 1954) ◈ Self-Portrait(1926)
독일인이었던 칼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프리다는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907년 멕시코 시티의 교외 코요아칸에서 태어나
1954년 사망하기까지 그는 단 한번도 평화롭게 산 적이 없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자기 집에서 멕시코 혁명 시기(1910~21)의
농민 지도자 자파의 부상당한 부하들을 보살펴 주기도 하는데,
그 영향으로 칼로는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자였다.
[그림]Frida Kahlo ◈ The Bus(1929)
칼로는 이상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웅대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리베라와는 달리 주변의 세계에서 소재를 취했다.
그녀의 이미지들은 항상 현실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어
생생한 경험의 직접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버스에서>는 사회계층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멕시코 사회의 전형적인 사회 계층들이 버스 안의 옆자리에 서로 앉아 있다.
이 작품은 사회적인 계층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일곱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18세 때 그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한다.
이 때 길다란 철봉이 그의 배를 관통하고,
척추·오른쪽 다리·자궁을 크게 다쳤다.
수 차례에 걸친 대수술, 끝없는 고통, 임신은 불가능
그녀의 삶은 이렇게 그녀의 꿈이 산산이 부서진 가운데 시작된다.
1년 동안의 깁스 이후 평생 동안 30여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의 일상적인 삶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사고로 인하여 멕시코의 국립 예비학교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의사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그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그의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된다.
칼로의 작품에는 자화상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사고 후 병실에 누워 있을때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 그림을 그렸으며,
퇴원해서는 침대 밑에 거울을 달아 놓고 거기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그것을 표현했다.
나는 나를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잘 아는 내 그림의 주제는 바로 나이다.”
[그림]Frida Kahlo ◈ Portrait of Diego Rivera (1937)
나의 가장 큰 꿈은 그의 아기를 갖는 거야
그녀는 병상에 있을 때 틈틈이 그린 그림을 가지고
무작정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찾아갔다.
자신의 그림이 가능성이 있는지
누구보다도 그에게서 먼저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녀와 리베라의 첫 만남이었다.
리베라는 그림을 보고 그녀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더불어 그녀의 피할 수 없는 매력에도 빠져들었다.
당시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화가였다.
또한 탁월한 예술의식과 민중의식을 가진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녀의 일편단심에 만족하며 살기에는
너무나 자유분방한 남자였다.
그는 넘쳐나는 바람기를 잠재우고자 하는 의지도,
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도 리베라의 그런 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림]Frida Kahlo ◈ Self-Portrait-Dedicated to Leon Trotsky) (1937)
그런 바람둥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
그러나 그녀에게는 오로지 디에고 리베라뿐이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의 사랑이 필요했던 리베라와,
오로지 리베라의 사랑만이 필요했던 그녀 사이에는
처음부터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리베라는 매우 불성실한 남편으로서 이미 자신의 많은
모델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칼로 역시 묵묵히 남편의 외도를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역시 많은 정부를 두었으며, 당시 멕시코에 망명을 하고 있던
트로츠키(Leon Trotsky, 1877-1940)와도 너무나 잘 알려진
짧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심지어 동성연애까지도
즐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림]Frida Kahlo ◈ A Few Small Nips (1935 )
그러나 리베라는 1934년 그녀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바람을 피워서,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다.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는
몇 군데 작은 칼집(A Few Small Nips)이라는 끔찍한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사실 이 그림의 제목은 실제로 있었던 살인사건 기사에서 인용한 것인데,
그 내용이 애인을 난도질해 죽인 한 남자가 경찰의 심문을 받자
"뭐, 몇 차례 살짝 찌른 것 뿐인 걸요"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는 이야기였다.
머리를 짧게 짜르고 리베라가 입으라고
권유했던 그래서 그가 항상 입고 다니던 전통 의상마저 벗어던진다.
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칼로는 결국 1939년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림]Frida Kahlo ◈ Self-Portrait with Cropped Hair (1940)
이러한 그녀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그림이 바로 <머리를 자른 자화상>이다.
그녀는 리베라가 가장 사랑했던 자신의 검고 긴 머리를 가위로 자르고,
멕시코 풍의 드레스 대신 양복을 입고 도전적인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그녀의 재능과 아름다움을 칭찬해 주고,
그녀가 육체적 고통 속에서 좌절할 때마다 그래도
그림은 그려야 한다며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도 바로 리베라였다.
그녀와 리베라는 서로의 예술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고,
이것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 가장 강한 힘이었다.
그래서 리베라는 그녀에게 고통이자 희망이었다.
[그림]Frida Kahlo ◈ Self-Portrait with Monkey(1938)
리베라가 그녀에게 준 가장 심각한 정신적 고통은
세 번에 걸친 유산을 통해 나타난다.
그의 남편 리베라는 이미 전처에게서 네 명의 아이들을 두었지만,
결혼 전부터 리베라의 아이를 반드시 갖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던
칼로에게 있어서 남편의 아이를 낳아줄 수 없다는 사실은
하나의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졌다.
40년대 이후로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주위를 많은 애완 동물이 나타나게 된다.
그 해에 같은 주제의 그림들이 다수인 것으로 보아 그녀가 다시 유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 <조그만 원숭이가 있는 자화상>등에서
그녀와 연결된 실크 리본을 감은 애완 동물들이 나타나는데,
매우 절망적으로 보인다. 칼로의 원숭이는 포기한 아이들 역을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Frida Kahlo ◈ Henry Ford Hospital(1932 )
<헨리포드 병원>은 1932년 디트로이트에서 그린 것으로
피투성이 자화상 시리즈 중의 첫 번째 작품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이 작품에 대하여 '미술사상 전례 없는 일련의 걸작들로
여성의 가치를 질적으로 고양시켰다.'고 언급했다.
이 그림에는 고독감과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표현을
수평선 쪽의 산업 사회의 풍경에 의하여 나타내고 있다.
칼로가 쥐고 있는 리본의 끈은 유산할 당시 그녀의 감정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물들로서 달팽이는
임신에 실패하게 되는 긴 유산의 과정의 상징이다.
또한 배경이 공장지대는 기술적인 진보의 상징으로서
화가 자신의 인간적인 운명과의 대조적인 특성을 표출하고 있다.
비록 그림에서 개인체험들이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생활과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헨리포드 병원>(1932), <프리다와 유산> (1932) 등과 같은 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예이다.
이 두 작품에서 보이는 칼로의 모습은 유산의 고통이 단지 유산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가 없다는 것에 대한 아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작품에서 그것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Frida Kahlo ◈ The Little Deer(1946 )
그러나 비록 이처럼 자화상이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표현이라 할지라도
작품 속의 그가 늘 우수에 찬 모습은 아니다.
<다친 사슴>속의 칼로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아주 강한 빛을 발하고 있다.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 작가인 헤이든 헤레라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는 비참할수록 주름과 리본으로 치장했다.
그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숭배하러올 수 있도록 그는 우상으로 변형되었다.
칼로의 작품들은 일종의 종교적인 기능을 가진다.”
[그림]Frida Kahlo ◈ Tree of Hope(1946)
도전적이며 자립적인 사랑
리베라와 그녀의 여동생과의 염문을 계기로 칼로는 달라졌다.
리베라에게서 독립해 자신만의 세계를 찾았고,
리베라의 세계는 또 그것대로 인정해 주었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에게 진정한 동반자가 된 것이다.
[그림]Frida Kahlo ◈ The Two Fridas (1939)
1938년 미국의 화랑에서 첫 외국 전시회 이후 성공적인 전시회의 호평은
그녀에게 경제적 독립을 줄 수 있게 되며,<두 명의 프리다>는 두 가지 상반된 개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작품은 이혼한 바로 직후에 완성된다.
두 모습 중에서 실제의 프리다의 모습은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후아나를 입고 있고
그녀 옆에서 그녀 자신의 분신으로 유럽풍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들 두 연인이 드러내놓고있는 심장은 하나의 혈관으로써 연결되어
있고 혈관의끝은 분리되어 유럽인 칼로의 드레스에는 피가 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그녀가 환상과 꿈의 세계에서 살면 이 세계에서 자신을 빼닮은
이중인물을 설정함으로써 고독에 대한 보상을 찾는 것이다.
1년 후인 1940년에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하게 되나 여전히 리베라는
불성실한 남편이었다. 영화배우이자 리베라 작품의 모델이며
칼로의 친구였던 마리아 펠릭스(Maria Felix)와 바람을 피우게 되는데,
이 시기의 칼로의 작품 <디에고와 나>에 그의 체념적인 상태가 보인다.
[그림]Frida Kahlo ◈Self-Portrait as a Tehuana (Diego on My Mind-1943)
칼로의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혀 있으며,
항상 단정하던 머리카락은 풀어 헤쳐진 상태로
목에 칭칭 감겨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답답함과 섬뜩함을 함께 주는 매우 인상적인 모습과,
매우 짙고 단정한 눈썹과 이마에는 디에고의 초상이
덤덤하고도 냉정하고 당당하게 그려져 있다.
분노와 충격이 아닌 체념과 무관심이 눈물 방울과
흩어진 머리카락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의 이마 위에 놓여 있는 리베라의 이미지는
그래도 버릴 수 없다는 칼로의 리베라에 대한 미련과 수용을 나타낸다.
칼로는 소유할 수 없는 리베라에 대한 자신의 강박관념
같은 집착으로 인해, 마치 덫과도 같이 그 이미지를
'생각'이라는 형태로 이마에 새겨 놓았다
[그림]Frida Kahlo ◈Roots (Raices-1943)
칼로의 자화상을 보면 고통스런 모습 위에 초현실주의적인면이 강조되어 있고,
에로시티즘이 억압된 내면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칼로가 자주 사용하던 신체의 일부분이 잘려있거나,
상부가 열린 모습들은 초현실주의 그림 속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의 작품의
여성적인 사고와 감정은 초현실주의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를 보면, 그녀는 독특한 개인적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산을 갈망하는 칼로의 현실이었다.
그녀의 초현실주의적인 화상은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한 방법이었지,
리얼리티를 버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리베라와 재결합한 그녀는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리베라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살았다.
리베라도 결국 자신의 집은 작업실로 사용하고,
그녀의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자신의 공간을 지키며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며
살아도 그녀에게는 늘 빈 곳이 있었다.
그녀가 죽은 후 출판된 그림일기에 그 빈 곳을 향한 몇 마디가 적혀 있다.
칼로의 리베라에 대한 감정은 양면적이었다. 칼로는 이렇게 말했다.
디에고 시작, 디에고 창조자,
디에고 내 아기, 디에고 내 애인,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내 남편,
디에고 내 친구, 디에고 내 어머니,
디에고 내 아버지, 디에고 내 아들,
디에고 = 나, 디에고 우주,
하나 안에서 변화 무쌍함…
이렇듯 리베라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이 보이는 반면
한편으로는 디에고에 대한 회한과 분노도 담겨 있다.
[그림]Frida Kahlo ◈The Love Embrace of the Universe,
the Earth (Mexico), Me, and Senor Xolotl (1949)
프리다 작품 중에서 고대 멕시코의신화가 특별히 정확하게
보여지는 작품이다. 여기서는음과 양이 경계를 갖고있는 모습으로
그녀의 이중적 원칙을 묘사하고 있다.
낮과 밤이 서로 스며들며 음기와 가벼운 물질,
태양과 달, 우주의 원자형태가 어두운 지구를
그 강력한 팔로 끌어안는다. 대지의 여신은
자궁으로부터 생명을 낳고 있다.
이작품에서는 그 이전까지의 절망적 심정을
소유가 아닌 모성의 관대함으로 순화된 칼로의
심리변화를 볼 수 있다. 이 작품 이후의 그림부터
칼로는 가장 고통스러워 보이는 자화상에서조차
결코 감상적이거나 나기 연민에 빠진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금욕적이고
냉정한 표정 속에서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묵묵한 결의가 뚜렷이 보인다. 그녀의 자화상들이 강인한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솔직함과 기교가 한데 어울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림]Frida Kahlo ◈ The Broken Column (1944)
1940년대가 끝날 무렵 그녀의 건강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조금 회복되었을 때부터 그리기 시작한 정물화들은 정치적인 견해로써
읽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치적 표현은그녀가
1948년에 멕시코 공산주의 연합에 가입한 이래로 그녀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국기가 이 시기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 상태는 표현력까지도 방해하고 있어서
그림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거친 필치로 표현되고 있다.
“일생 동안 나는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16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이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이다.”
칼로는 1954년 건강 악화로 숨을 거두었고,
리베라는 3년 뒤인 1957년 자신의 72세 생일 날
암으로세상을 떠났다.
[그림]Frida Kahlo ◈ Self-Portrait with the Portrait of Doctor Farill (1951)
칼로의 작품에 내재된 여성주의(Feminism)적 요소
페미니즘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여성주의 미술이
출현한 것은 서구에서는 1970년대이다.
칼로가 죽은 뒤에 미술사적 위치가 재조명된 시기도 이때이다.
칼로의 작품은 1954년에 그녀가 죽을 때까지도
외부세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1970년 초반이 되서야 일반대중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여성 해방론자들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칼로가 비극적인 한여성 해방론자이며,
제 3세계의 여성들에게 칼로는 위대한 본보기였다.
[그림]Frida Kahlo ◈ What the Water Gave Me (1938)
그녀의 그림이 여성이 지니는 고유한 현실과 이에 대한 체험을
그 누구보다도 포괄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멕시코의 민속과 문화에 열중했었고,
비극적 정경에 대해 극적인 애정을 품고 있었다.
여기에 그녀의 전설만큼이나 풍부하고 매혹적인 그림들이 있다.
오늘날 그에 대한 관심은 단지 미술 문제, 즉 작품 세계에만 놓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엘자 쉬와파렐리 같은 디자이너는 ‘마담 리베라’라는
전통 멕시코 의상에서 디자인 영감을 얻었으며,
패션 잡지 《보그》는 그의 반지 낀 손을 표지로 장식하기도 했다.
◈ Frida Kahlo 스틸 사진 ◈
이는 그의 삶이 매우 연극적이었으며,
또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서서리를 착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관습은 요란스러울 정도로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면모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를 살아가는 여성의 한 우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칼로는 현재 멕시코나 미국에서는 가장 숭앙받는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이며
멕시코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이다. 1989년 5월 그의 자화상 중
하나는 1백50만 달러에 뉴욕에서 팔렸고, 1995년에는 3백50만 달러에 팔려
가장 비싼 라틴 아메리카 미술품이라는 기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