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명화갤러리[명화·신화이야기]
욕망과 죽음 외줄 위 비틀대는 '삶의 전쟁' 인간의 몸은 한 장의 파피루스이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향기를 가진 채 숨쉬는 따뜻한 파피루스. 그 속에 그 몸의 주인이 걸어온 길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기억과 고통,노래와 비명,직선이거나 곡선인 길과 숲, 집과 들판의 지형들이 몸을 뒤덮은 주름 속에 기호처럼, 상징처럼 새겨져 있는 것.그건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림]Egon Schiele(1890-1918) ◈The Family (1918) 인간의 몸에 새겨지는 주름이라는 무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기록하는 지도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몸에 귀를 갖다대면, 그 몸이 기억하는 바람소리가,강물소리가, 천둥과 번개의 나날들 어느 순간이 고스란히 들려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서 언제나 죽음 쪽으로만 진행되던 시간이 멈추는 순간, 몸이라는 한 권의 지도,한 권의 책은 완성된다. 그 책의 앞표지가 탄생이라면 죽음은 뒤표지인 셈. 그러므로 타인의 몸을 바라본다는 일은 은연 중에 타인의 삶을 읽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일 것이다. 어디 한 번 덤벼보시지, 하는 듯한 자세로 그림 Fighter 속의 사내는 그림 바깥을 쏘아보고 있다. 하지만 그림의 제목인 '투사'(1913)가 무색하리 만큼 사내의 몸은 앙상하다. 근육이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은 팔다리,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 빈약한 상체, 전의에 불타기는커녕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동그랗게 뜬 눈과 쑥 내민 입술. 그것들은 그림과 마주 선 관객의 경계심을 해체시켜 놓기에 충분해서 나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타인의 몸을 샅샅이 들여다본다. [그림]Egon Schiele(1890-1918) ◈Embrace /Lovers II(1917) 그러자 그림 Fighter 속 사내의 빈약한 몸은 의외로 풍부한 표정과 역동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사내의 동그랗게 부릅 뜬 시선이 어딘 지 불안해 보인다는 느낌도 갖게 된다. 비뚤비뚤하고 흔들려 보이지만 그러나 확신에 찬 손놀림으로 그려나갔음이 분명한 완강한 선들은 그림 속의 사내가 가진 자신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듯 하다. 그러고 보니 사내의 몸에 덧입혀진 붉고 검은 색감들은 어딘가 주검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그렇구나. 사내는 타인을 향해 호전적인 자세로 전의를 불태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 속에,몸이라는 존재의 집에 도사린 불안과 마주서 있음이 분명하다. 그 불안이란 다름 아닌 죽음일 테고 언젠가는 소멸해버려 흔적도 없어질 자신의 몸 속에서 생명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는 것일 테다. 죽음에 관한 불안이나 공포는 정면으로 마주 설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어서 사내는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을 만큼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정면이 아닌 측면의 자세란 사내가 열어놓은 퇴로에 다름 아닐 터. 일순 당당하고 일순은 또 불안에 사로잡힌 듯한 포즈로 사내는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가 가진 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 속엔 또한 죽음만큼이나 무거운 욕망,죽음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관능적 욕망도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림]Egon Schiele(1890-1918) ◈Death and the Maiden (1915-6) 죽음에의 공포가 도피를 위한 퇴로를 마련해놓듯이 내밀한 관능적 욕망은 삶의 용기를 일으키는 원동력일 것이다. 인간의 몸이 가진 관능에의 욕망이란 죽음과 마주설 수 있을 만큼 또한 힘이 센 것. 죽음과 욕망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그늘을 동시에 몸 속에 가둔 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시간은 늘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림Fighter 속의 사내는 자신의 몸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욕망의 자세와 죽음에의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자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죽음과 욕망의 경계 지점에 서 있는 사내는 아마도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싸움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몸이라는 텍스트, 바스러지기 쉬운 한 장의 파피루스를 읽는 일일 것이다. 들판과 숲,꽃과 허방이 동시에 존재하는 뜨겁고 또 차가운 지도 혹은 책. 욕망이 충족되는 승리의 시간과 죽음에 패배하는 두려움의 시간을 상상하며 그림 속의 사내는 다시 한 번 외친다. 자 어디 한 번 덤벼보시지. 한 판 붙어 보자고. 그러나 여전히 사내의 자세에는 허점이 많다. 그 허점 속으로 별이 뜨고지고 길들이 헝클어지고 소리없는 시간이 꾸불꾸불 흘러간다. 타인의 몸을 응시한다는 일은 내 몸을 들여다보며 사유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에의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인간의 몸은 또한 역설적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알겠다. 김형술시인 [그림]Egon Schiele(1890-1918) ◈Self-Portrait Pulling Cheek (1910) 에곤 쉴레 (Egon Schiele,1890~1918)는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변의 튤린에서 태어났다. 미술학교에서 수학 중 당시 이름높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그를 후원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아놀드 쉔베르그 및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동시대인으로서, 쉴레는 빈에서 보여진 개인적,심리적 현상 및 지적 운동에 관여했다. 본질을 탐구하던 당시의 지적인 틀 안에서 개성의 내부 구조를 탐색하는 것이 비엔나 제국 말엽의 퇴폐와 위선의 의식이 쉴레 작품의 내용이 되었다. 그의 주요 소재는 자화상과 여인들,대표작으로는 '포옹'(1917) '죽음과 소녀'(1916) '가족'(1918) 등이 있다.
2004-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