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명화갤러리[명화·신화이야기]

보티첼리의 생애 -끝

인생멘토장인규 2008. 11. 14. 02:06


[그림]Sandro Botticelli (伊,1444-1510)◈ Portrait of a Man with a Medal (1480)







그림을 클릭하면 큰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보티첼리의 생애"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명 산드로 필리페피(Sandro Filipepi)라고도 한다.
    보티첼리란 이름의 뜻은 '작은 몸통 little barrel'인데
    그의 형이 살이 쪄서 붙여진 별명으로 그에게도 사용되었다.
    이 별명이 그의 성이 되었다.

    메달을 가진 자화상 (1470)은 보티첼리의 초기 작품으로
    아직 독자적인 화풍이 성립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베로키오와 폴라이우올로 등 당대 피렌체
    제일의 화가들에게 받은 영향이 나타난다. 이 작품 외에도
    다른 자화상이 있는 데 모두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그림]Sandro Botticelli (伊,1444-1510)◈ Portrait of a Young Man (1485)
 





    보티첼리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오기 전에 필리포 리피로부터
    수학했으며 그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청년기의 작품에는 베로키오, 폴라이우올로 등 당대의 피렌체 제일의
    유명 화가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만. 1470년대 중기에는
    보티첼리의 독자적인 미술가적 개성이 확립되었다.

    보티첼리는 아주 분명한 윤곽선으로 자신의 인물상들을 제작했으며,
    처음부터 그는 그 인물들이 작품의 나머지 부분에 생생하게
    반응하도록 배치하였다.




[그림]Sandro Botticelli (伊,1444-1510)◈ The Return of Judith (1470)
 





    초기의 작품에 속하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스>에서 볼 수 있는
    역동적인 윤곽선의 뛰어난 그림구성 솜씨는 아주 젊은 시절에
    제작한 이 작품에서 나타나 그의 미술의 주된 특징의 하나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림]Sandro Botticelli (伊,1444-1510)◈ Fortitude (1470)
 




    이와 같이 피렌체회화는 격렬한 움직임과 떨림이 강한 윤곽선을
    유지하였으며 많은 작품의 소재는 고전 작품에서 가져왔다.
    이는 15세기말에 유행했던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그들은 고전을 연구하면서 종교를 인간작인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그리스 로마의 예술,철학,종교의 문화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을 꽤했다




[그림]Sandro Botticelli (伊,1444-1510)◈ Pallas and the Centaur (1482)
 





    도끼모양의 길다란 창을 손에 가진 지혜와 전쟁의 여신 팔라스가
    화살집을 둘러메고 오른손에 활을 쥐고 폭력과 무지를 상징하는
    반인 반마인 켄타우로스의 머리털을 부드럽게 거머잡고 있는 광경이다.

    팔라스는 뭔가 생각에 잠긴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고,
    그녀의 옷에는 메디치 가문이 사용한 다이아몬드 문양이
    들어 있으며 감람나무 가지가 얽혀 있다.
    반면, 켄타우로스는 슬픈표정에다 겁을 집어먹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그림은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디 피에르 프란체스코를 위해
    그려진 것으로 말해지고 있고, 19세기 중엽에 피티궁에 들어갔다가
    1922년 이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왔다.

    제작 연도는 로렌초가 나폴리왕으로 하여금 피렌체 시민에게
    적대하지 않도록 설득에 성공한뒤,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귀국한 1480년 설과 메디치 가문이 더욱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굳히는 1486년 설이 있다.

    그러나 작품 양식으로 미루어 이 화가가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를
    그린 뒤에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간 직후인 1482~83년 무렵으로
    보는견해도 있다.한편 이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승리의 상징설 외에
    이성(팔라스)이 본능(켄타우로스)을 제어 한다는 도덕적 내면이
    상징되어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림]Sandro Botticelli (伊,1444-1510)◈ Portrait of Dante  (1495)
 





    또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을 위해 펜으로 드로잉(1500∼1507)도 많이 그렸다.

    1498년 사보나롤라가 순교하자 보티첼리는 그의 슬픈 추종자로서
    예언자적 신비주의로 변모하였으며, 1501년 제작한 《신비의 강탄(降誕)이나
    《신비의 십자가》와 같은 신비적 환상으로 가득 찬 작품을 그렸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의 설치장소를 심의하는 위원회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함께 출석하였으나,
    그 후 그는 제작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소식마저 끊었다.




"끝"


 

 

2006-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