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제우스·포세이돈·비너스가 누구인지는 훤히 알아도, 태호 복희·자오지·부루가 누구인지는 도통 모른다. 태극기의 팔괘를 처음 그리신 분이 태호 복희씨이며, 최초로 동방을 대통일한 천자가 바로 자오지 환웅천황이며, 단군왕검의 맏아들로서 우임금에게 홍수 다스리는 비법을 전해준 분이 부루태자인데도 말이다.
이런 부끄러운 세태 속에서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우리 곁에 친숙히 다가온 영웅이 있으니, 그분은 바로 배달의 치우천황. 한국 축구대표팀 서포터스 클럽인 붉은악마의 붉은 깃발에 치우천황 캐릭터가 그려져 경기 때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나부끼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치우는 먼 옛날의 신화 속의 전쟁영웅이나 고작 험상궂은 도깨비 정도로 잘못 알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간략하게 나마 치우천황의 실체를 더듬어 보자. 월드컵 경기로 되살아나는 치우천황 승리를 기원하며 치우천황께 제를 올리고 한국팀의 2002월드컵 첫 경기인 폴란드와의 결전이 있기 얼마 전, 월드컵 경기장 바깥 한켠에선 십 여명이 치우천황께 제를 올렸다. 자리를 펴고 돼지머리에 간단한 제수를 올려놓고 정성껏 제를 올린 것이다. 곧잘 전쟁에 비유되는 축구경기를 앞두고 군신(軍神)으로 숭앙받아온 치우천왕께 제를 올려 한국 축구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한 것이다. 치우신을 모시면 어떤 전쟁에서든지 이긴다고 하는 믿음이 역대 제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있었다. 제나라의 시조 강태공과 진시황, 한무제까지 팔신제(八神祭)1)를 봉행하였는데 그 팔신(八神) 중에 병주(兵主), 즉 전쟁신의 우두머리가 바로 치우천황이다. 한고조 유방은 항우와의 최후 결전에 나가기 앞서 치우천황께 제를 올렸다고 하고, 오랜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하고 한나라를 세운 뒤에는 치우의 사당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 역시 싸움에 나가기 전 치우사당에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경기장 일대는 저녁 내내 안개가 드리우고 지난 6월 4일 부산 월드컵 경기장, 응원열기가 고조되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더해지고 전운(戰雲)마저 감도는 듯하다. 마치 전쟁에 출전하는 군인들을 대대적으로 환송이라도 하는 것 같다. 부산 일대는 맑은 날씨임에도 어찌된 영문인지 새벽부터 엄습한 안개가 저녁 내내 걷히지 않아, 경기장 안쪽에까지 옅은 안개가 드리워져 다소 시야를 방해한다. 그 안개를 헤치며 달리는 선수들과 축구공을 지켜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한국팀의 승리를 돕고자 치우천황이 조화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4700여년 전 배달의 치우천황은 도술이 고강하여 전쟁에서 큰 안개를 잘 지어 적군을 혼란에 빠뜨려 대승을 거둔 화려한 전적이 있다. 월드컵 우승을 향해 치우천황기를 휘날리고 경기장은 온통 붉은 물결, ‘대∼한 민국 짝짝 짝 짝짝!’하는 천둥같은 함성과 힘찬북소리가 경기장을 뒤흔드는 가운데 태극기가 한껏 펄럭인다. 경기장 한쪽에선 붉은악마의 치우천황기(蚩尤天皇旗)가 휘날리며 승리의 기운을 뿌려댄다. 한마디로 치우천황기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축구의 빛나는 승리를 향한 결연한 표식인 것이다. 진한시대의 백성들은 높이가 7척이나 되는 치우천황릉에 매년 10월이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삿날에는 능 정상에서 하늘 위로 반드시 붉은 기운이 치솟아 마치 붉은 깃발이 나부낀 것 같았는데, 이를 치우기(蚩尤旗)라 하였다.2) 이후로 치우기를 휘두르며 출정하면 치우의 영험으로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역시나 다를까! 한국팀은 축구강국 폴란드를 맞아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며 2-0이란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이번 경기는 월드컵 출전 사상 48년만에 거둔 첫승이자 16강 진출의 물꼬를 틔운 역사적인 명승부로 기록된다.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과 선수들의 투혼, 그리고 12번째 선수인 붉은악마와 온 국민의 응원 에너지가 불타올라 빛나는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13번째 선수가 있다. 신도(神道)에서 한국축구에 승기(勝氣)를 뿌려주는 치우천왕이 바로 그분. 아니 어쩌면 이 치우천황은 히딩크 감독과 23명의 태극전사 선수보다 앞서는 0번째 선수일 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치우천황 도깨비가 아닌 실존 인물, 치우 치우천황은 지금껏 동북아시아 특유의 군신신앙(軍神信仰)으로 살아남아 있으며, 치우상·도깨비상·장승·귀면와(鬼面瓦, 도깨비기와)·단오부적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귀면와에 도깨비를 그려 넣을 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치우천황의 형상이다. 도깨비의 가장 큰 특징은 뿔인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소뿔이다. 이 뿔의 기원은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 머리에 무쇠 이마)란 별칭이 붙은 치우천황의 투구 모양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치우천황을 형상화한 것이 도깨비 문양이지 도깨비 그 자체가 치우천황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배달의 치우천황은 분명 우리 역사 속에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는 실존 인물이다.
배달의 14대 자오지 환웅천황, 치우
‘환국(환인)-배달(환웅)-조선(단군)…’으로 내려오는 한민족사의 국통을 보면, 3301년간 일곱 분의 환인천제가 다스린 환국을 이어 배달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다. 그 배달국 당시, 서기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린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이 곧 치우천황이다. 치우(蚩尤)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지어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 때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동방 최초의 국제전쟁)가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다.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최초로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는다.3)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도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 때부터이다. 이후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원이 되어 수천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한나라 진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 치우에 대한 역사왜곡, 사마천의 『사기』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몰살당한 사실이 있다. 이것을 두고 훗날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와그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또 당시의 상황을 “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헌원은 황제로 격상되어 지존의 존재, 하늘과 같은 존재로 떠받들어 놓고, 치우는 수신인어(獸身人語, 짐승 몸에 사람 말을 함)로 묘사되어 짐승 같은 존재, 요술부리는 아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켜 놓았다. 근원적인 역사왜곡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월드컵 열풍으로 되살아나는 치우천황
세계인의 축제, 2002 한일월드컵을 맞아, 치우천황이 붉은악마의 마스코트를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치우천황은 도깨비도 아니며 신화 속의 등장인물도 아니다. 역사왜곡과 후손들의 무지로 뒷전에 밀려나 있을 뿐, 엄연히 동방고대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실존 인물이며 우리 한민족의 자랑스런 조상이시다.
하지만 단군의 실체에 대해서도 고개 돌리고 있는 마당에 그보다 더 오랜 인물인 치우천황을 역사 속으로 불러오는 일이 쉬운 작업은 아니다. 이번 기회에 그분의 실체와 치적, 그리고 동북아에 미친 문화적 역량이 밝혀져, 우리의 잃어버린 민족혼과 꺾여버린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는 밑거름이 되고 오늘의 역사를 조명하는 작은 불씨가 된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이번의 호기를 그냥 놓치지 말고 온 국민이 하나되어 민족의 웅비를 향한 힘찬 날갯짓으로 승화시켜 나가자.
자료출처 월간개벽 200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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