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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명문가와 고택

인생멘토장인규 2009. 7. 3. 09:35

 

 

 

 

 

名門家(명문가)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당대에 반짝했다가 아들, 손자 代(대)에 가서 형체도 없이 사그라지는 집도 많다. 명문가는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검증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검증기간이 필요한가? 필자가 보기에는 최소한 100년은 지나야 한다. 100년이면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 사람의 觀相(관상)을 고치려면 최소한 3대는 노력해야 고쳐진다는 말이 있다. 1대만 노력해서는 불가능하다. 祖父(조부) 때부터 노력해서 아버지를 거쳐 손자 대까지 노력해야만 좋지 않은 관상이 좋은 관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성격이나 타고난 기질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명문가는 역사가 오래된 집이고, 역사가 있다 보니 古宅(고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단 어느 집안이 역사가 있는, 수백 년 된 고택을 보유하고 있으면 그 집안은 명문가다. 명문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물적 증거는 바로 고택 소유 여부다.
 
 
  자존심 강하고 명예를 중요시하는 집안
 
  고택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첫째, 재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대지 4950㎡(500평)~3300㎡(1000평)에다가, 50~60칸 규모의 韓屋(한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재력을 상징한다.
 
  둘째, 이러한 규모의 고택은 조선시대에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재력도 재력이지만, 그 집안의 先代(선대)에 유명한 인물을 배출했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고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윗대에 유명한 조상을 두었음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퇴계 이황과 같은 조상을 두고 있으면, 그 후손들은 고택을 아직까지 지키고 있기 마련이다. 선대의 카리스마는 그 집안을 유지시키는 정신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손들이 조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연히 처신에 조심하기 마련이다.
 

 


 

 


  셋째는 고택이 있는 후손들은 남다른 자존심이 있다. 자존심이 있는 집안 후손과 없는 집안 후손은 행동거지에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처신을 해야 할 때에 이 자존심이 작동한다. 어지간한 이해타산보다는 자존심을 택하는 결정이 그것이다. 사람은 자존심이 없으면 당장 눈앞의 이익을 쫓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주변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망신당하기 마련이다.
 
  거주하기가 편리한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아직까지 전통 한옥에서 거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명문가는 이 자존심이 있는 집안이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 하고 물을지 모르지만, 명문가는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밥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집안이다.
 
  넷째는 풍부한 문화적 전통이다. 집안의 족보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예를 들면 7대조 할아버지가 어떤 집안하고 혼사를 했고, 그 할아버지의 외가 쪽 조카가 벼슬을 해서 지방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 지역에서 나온 특산품 붓으로 쓴 글씨를 병풍으로 만들었고, 그 병풍에 써진 글씨의 내용이 소동파의 ‘赤壁賦(적벽부)’ 내용이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윗대 조상의 역사와 일화를 소상히 알고 있다.
 
  집터와 묘터를 감별하는 風水(풍수), 집안 내의 친척관계와 다른 집안과의 婚脈(혼맥) 등을 꿰뚫는 譜學(보학), 한옥의 재료와 건축방법에 관한 古建築(고건축), 유교와 불교의 古典(고전), 漢詩(한시), 먹을 만한 음식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다. 얼굴에 그러한 소양이 풍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도 화제가 풍부하여 대화를 잘 이끌어 간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

 


  
  다섯째는 신중하다는 점이다. 수백 년 된 고택을 지금까지 유지해 오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기 마련이다. 기복 없는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이런 난관에 부닥쳐서 어떻게 대처를 하느냐이다. 대처에 특별한 비결은 없다. 오직 신중해야 한다.
 
  신중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과 행동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우선 얼굴빛이 온화하다는 점이다. 온화한 얼굴빛을 띠려면 감정이 절제되어 있어야 한다. 감정이 가라앉아 있어야 가능하다. 감정이 흥분되어 있으면 얼굴이 온화할 수 없다. 온화할 수 없으면 대인관계나 일 처리할 때에 쓸데없는 마찰을 야기할 수 있다.
 
  또한 얼굴빛이 평온하면 상대방에게 호감을 준다. “아! 이 사람은 인격자구나,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하는 인상을 준다. 좋은 첫인상은 상대방에게 이득을 주지 않고도 호감을 주는 방법이다.
 
  신중하다는 것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선뜻 확답을 하지 않는 스타일을 가리킨다. 시간을 갖고 결정을 내린다.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신중한 장점으로 전환된다. 명문가 후손들은 대체로 얼굴빛이 온화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공통점이 있다.
 
  여섯째는 積善(적선)하는 습관이다. 명문가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 적선에 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을 믿는다. 증조부가 이것을 믿었고, 조부가 믿었고, 부친이 믿었으니 자기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적선을 해야만 집안이 잘된다는 믿음은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다. 명문가 후손들은 ‘적선지가 필유여경’이 종교적 신념이다.

 

 

 

 


조용헌의 '명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국의 명문가 9곳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

 

 

신간 ‘조용헌의 명문가’(랜덤하우스코리아)는 조선 500년과 근세를 관통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특권층의 도덕적 의무)’를 발휘했던 대한민국 명문가들을 다룬다. 명문가들이 태동하고 성장하던 시기에 발생한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과 당대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다.

 

▲ 사랑채에 담장이 없는 것이 특징인 윤증 고택. / photo 랜덤하우스코리아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각종 사화와 당쟁을 거치는 동안 힘의 균형이 어디에 쏠렸는가에 따라 권력 구조 역시 재편됐다. 집권 세력에 속한 인물들은 중앙에 진출해 주류 역사를 형성했고, 벼슬길이 끊겨 귀거래(歸去來)를 한 사람들은 향토문화를 육성했다. 현재 영남 지역에 고택이 많이 남은 이유는 조선후기 150년 동안 영남의 남인들이 정계에서 배제됐던 역사적 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정계에 진출했던 기호지방의 노론에 비해 영남의 남인들은 집안 보존과 관리에 더 철저했던 것이다.

저자는 사주명리학의 대가답게 풍수도참의 관점에서 명문가의 탄생 조건을 설명하는 데에도 비중을 둔다. 한국 명문가들이 풍수적인 길지에 터를 잡은 데에는 한국 선비들의 학문과 사상의 흐름에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선비들은 젊은 시절 ‘유가(儒家)’를 선호하지만 세상의 험한 꼴을 겪다가 50대를 넘어서면 ‘도가(道家)’를 지향했는데, 도가는 공통적으로 풍수도참과 지형지물법에 밝았다. 물론 저자는 ‘지리’에 ‘인물’과 ‘덕행’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명문가가 탄생했다고 강조한다.


논산 명재 윤증 집안

‘허례허식 빠지지 말라’ 담장 헐고 후학 양성, 한국야쿠르트 윤덕병 회장이 명재의 8대손

논산의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 고택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다. 숨길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재는 자기관리에 철저했고, 후손들이 허례허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별한 신경을 썼다. 또 서민들의 생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했고 ‘종학당’이라는 사립 교육기관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다. 종학당은 문중의 후손뿐만 아니라 주변의 학생들에게도 개방됐다. 교육을 시키면서 노동력의 손실에 대한 대가로 오히려 장학금을 지불했다.

사실 윤증 고택은 명재가 아니라 명재의 첫째 아들 윤행교가 살았던 집이다. 명재의 말년에 둘째 윤충교가 장손이자 형님인 행교를 위해서 1709년 지어준 저택이다. 명재가 죽기 5년 전인데, 명재는 유봉에 살면서 이 집을 가끔씩 들르는 정도였다.

명재 집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재정적으로 가장 많이 뒷받침해 준 후손은 한국야쿠르트의 윤덕병 회장이다. 명재의 8대손이다. 다른 후손으로는 윤양중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윤호중 한국아쿠르트 전무, 윤석영 전 삼성그룹 전무, 윤석하 한국제분 사장, 윤춘식 연세대 의대 교수 등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 경주 손씨 집안

소문난 인재 가문… 종택 ‘서백당’은 550년 역사, 손제석 전 문교부 장관·퍼시스 손동창 회장…

조선시대 ‘베벌리힐스’라고 할 수 있는 양동마을에는 경주 손씨 집안의 종택인 서백당(書百堂)이 있다. 서백당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다. 경주 손씨 집안은 후손 교육이 각별해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서백당’이 지어진 시기는 양동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1433~1484) 때부터다. 손소가 처가 마을인 양동에서 살기 시작한 게 1458년부터이니 서백당도 이 무렵에 지어졌으리라 추정된다고 한다. 양민공의 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대에 이르러 손씨 집안의 명성이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양민공부터 따져보면 현재의 증손 손성훈(48)씨는 20대손이다. 이렇게 보면 서백당은 20대 550년의 역사를 지녔다. 후손으로는 경동보일러 회장을 지낸 고(故) 손도익, 문교부 장관을 지내고 위덕대학 명예총장으로 있는 손제석, 동양석판 손열호 명예회장, 퍼시스 손동창 회장, 서울대 손봉호 교수 등이 있다.
 
 
 

경북 안동에 있는 고성 이씨의 종택 임청각(臨淸閣). 500년의 역사를 지닌 이 집은 원래 99칸이었지만 중앙선 철도가 놓이면서 현재 70칸 규모의 한옥으로 남아 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제공
 


전남 담양 창평 고씨 집안

교육·민간 구휼 앞장… 3부자가 독립운동에 투신, 고재욱 전 동아일보 사장·고재필 전 보사부 장관…

교육, 민간 구휼, 국난 극복이라는 명문가 조건을 전방위적으로 갖춘 집안이다. 일제의 자본시장 침탈을 막기 위해 창평상회를 세워 민간대출과 생필품 보급에 힘썼고, 근대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임진왜란 때는 3부자가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또 다시 3부자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고씨 집안에는 구한말 호남의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1848~1907)과 창흥의숙을 세워 호남의 인재들을 길러냈던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1863~1933)라는 두 노선이 공존했다. 고광순은 목숨을 던져 의병을 일으켰고 고정주는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도 서로 간에 반목 없이 공존했다. 후손으로는 고재욱 전 동아일보 사장, 고재필 전 보사부 장관, 고재청 전 국회 부의장, 고윤석 전 서울대 부총장, 고일석 무등양말 창업자 등이 있다.


우당 이회영 형제 가문

정승만 10명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명성, 일가족 만주서 독립운동… 부통령 이시영만 생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일가는 정승을 10명 정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이었다. 조선의 경반(서울에 거주하는 양반)과 향반(시골에 거주하는 양반)을 통틀어 최고 명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집안이다. 백사 이항복 이래로 열명의 재상을 배출했다. 아홉명의 영의정과 한명의 좌의정이 바로 그들이다. 광복 이후 이승만 정권 때 우당의 동생 성재 이시영이 부통령을 지냈으니까, 성재까지 영의정급에 포함하면 열한명의 재상급 인물이 한 집안에서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회영 일가는 을사늑약이 이뤄지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해 일가족 전체가 만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했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동안 가세는 기울었고 식구들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이는 6형제 중 다섯째인 이시영뿐이었다. 귀국한 이시영은 공항에서 회환의 눈물을 쏟았다. 후손으로는 이종육 전 외무부 영사, 이종환 예비역 대령, 이종국 전 한국교원대 교수,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종걸 국회의원 등이 있다.


인동 장씨 집안

학벌로 新명문가 대열에 든 수재 가문, 장하진 전 여성부 장관 등 교수 즐비

귀족 계급이 사라지고 난 후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가장 큰 요소는 ‘학벌’이 됐다. ‘부(富)’가 있어도 ‘문(文)’을 갖추지 못하면 졸부에 그친다. 인동 장씨 집안은 ‘학벌’로 신명문가 대열에 든 수재 집안이다. 3선 국회의원인 장재식씨와 두 아들인 케임브리지대학의 장하준 교수, 런던대학의 장하석 교수를 들 수 있다. 장재식씨의 큰형 장정식씨는 전남대 의대를 나와서 전남대 의대 안과 교수를 지냈다. 장재식씨의 둘째 형이 장충식씨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했고 광주 시의원, 전남 도의원, 후지필름 대표 등을 지냈다. 장충식씨의 큰딸이 장하진씨다. 이화여대를 나와 충남대 교수를 하다가 여성부 장관을 지냈다.

장하진씨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 고려대 장하성 교수다. 장하성 교수의 여동생은 장하경씨로 광주대 교수이고, 장하성 교수의 남동생이 장하원씨다. 장하원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하나금융경영연구소 대표를 지냈다. 장재식씨의 바로 위 형님이자 장충식씨의 동생이 장영식씨다.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계량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뉴욕주립대 교수이다.
 

 

 

     안동 고성 이씨 집안

    99칸 ‘임청각’에서 벼슬보다 풍류 즐긴 선비 가문, 가문 전체가 독립운동 투신…  


 

▲ 석주 이상룡 선생
고택에는 집주인의 문화적 취향과 실용적인 목표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고택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이 바로 고성 이씨의 종택인 임청각이다. 임청각의 11대 종손인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1726~1773)으로 대표되는 고성 이씨 일가는 세속의 욕망을 벗고 인간의 자존을 지키며 풍류를 즐긴 선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400년 전에는 3대가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를 해 삼세유허비를 세웠고 400년 후에는 다시 3대(이상룡·이준형·이병화)가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더 정확하게는 이상동, 이봉희, 이승화,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등을 포함해 아홉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99칸의 대저택 ‘임청각’ 대문 앞에는 낙동강을 오르내릴 수 있는 유람선의 접안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런 집안이 일제 강점기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향했다. 집안의 자손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그 후손들은 고아원에서 자라야만 했다. 초대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이 바로 임청각의 종손이다.
 
정읍 평사리 강진 김씨 집안


명당 중 명당… 학행·덕망 높아 두루 존경, 김택술 전 의원·김민균 서울대 교수 등

명당 중 명당에 자리 잡은 강진 김씨 집안의 규당 고택으로 ‘공동체의 평안’이 명당과 명문가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명당은 하늘이 만들지만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강진 김씨 규당(圭堂) 김영채(金永采·1883~1971)의 집안은 벼슬이 높지 않았음에도 학행과 덕망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강진 김씨들은 전북의 칠보와 태인 일대에서 500년 가깝게 향반으로 알려진 집안이다. 외부적으로 화려한 인물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실속이 있는 집안이었다. 실속이란 지방민의 존경과 인심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후손으로 김택술 전 국회의원, 김학균 미국 심장병 전문의, 김희균 미국 마취과 전문의, 김민균 서울대 교수, 김병욱 강남 고려병원장 등이 있다.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집안

세종의 5남… 500년 역사 필경재가 종택, '서울시장'만 20명에 이범진·이위종…

▲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의 종택 ‘필경재’.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전주 이씨다. 때문에 전주 이씨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로열 패밀리’로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전주 이씨는 현재 남한에 280만명, 북한에는 140만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조선왕조 역대 왕자의 수는 총 125명이었다. 후손이 끊어진 왕자는 21명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파는 104개다. 이 104개의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많은 파는 ‘효령대군파’다. 약 35만명이다. 그런데 역대 관리를 많이 배출한 파는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파다.

서울에서 500년 내력을 지닌 유일한 고택인 필경재(必敬齋)는 이 집안의 종택이다. ‘필경재’는 ‘반드시 공경해야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한정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필경재는 인조반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 300년 동안 조선의 주류 집안 위치를 지켜왔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한산성 축조를 주도했던 집안이기도 하다.

집 뒤에 남아 있는 43만㎡(13만평) 묘지에는 700여기의 조선시대 묘지가 예법에 맞게 보존돼 있어 가히 묘지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대표적 후손으로는 광평대군의 10대손 녹천(鹿川) 이유(李濡)가 있다. 녹천을 포함해 ‘서울시장(한성판윤)’을 20명이나 배출한 이 집안의 가풍은 ‘수도 방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대한제국 러시아 초대공사였던 이범진과 이위종 등이 있다.


간송 전형필 집안

일제 때 3大 부자… 문화재 보존으로 독립운동, 종로 배오개의 간송집은 한국 미술사의 요람

▲ 간송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 집안은 ‘문화재 보존’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구한말 10만석 재산을 가진 갑부 중 갑부였던 간송 집안은 일제 강점기에 뿔뿔이 흩어진 문화재를 구입하는 데 재산을 썼다.

간송 집안은 화신백화점을 가지고 있었던 박흥식, 광산을 해서 큰돈을 벌었던 백부잣집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서울의 3대 부자로 알려졌다. 간송 집안은 문화재 소장이라는 한 우물만 팠기에 전란을 거치면서도 책잡히지 않았고, 문화재 역시 오늘날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

간송과 이 집안의 내력을 소상하게 정리해놓은 문건이 최완수의 ‘간송 전형필’이다. 여기에 보면 정선 전씨 채미헌공파인 간송 집안의 중시조는 고려말의 인물인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으로 나온다. 또 간송 집안이 본격적으로 부자가 된 시기는 전성순의 장남 전흥주(1786~1838)대부터라고 한다.

한편 서울 종로 배오개의 간송 집은 한국미술사의 요람이기도 하다. 고고미술동인회가 이 집에서 결성됐다. 1960년 8월 창간된 ‘고고미술’ 제1권 제1호가 바로 이 배오개 집에서 발행됐다. ‘고고미술동인회’가 발전해 오늘날의 ‘한국미술사학회’가 된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간송의 장남 전성우와 차남 전영우가 살고 있다. 장남 전성우 화백은 보성중고등학교의 이사장이고 차남 전영우씨는 간송미술관을 주로 맡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