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Artemisia Gentileschi(伊,1593-1652)◈Self-Portrait as a Female Martyr(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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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 ~ 1652) 는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여성적 범주로 널리 다뤄지던 초상화, 정물화 등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대신 영웅적 여성을 다룬 성경과 신화를 즐겨 그림으로서 17세기 회화의 관습을
변형시켜 여성의 이미지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 화가로 평가된다.
또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자신의 작품에 싸인한 첫번째 작가이다.
일반적으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카라바지오의 영향 하에 있으면서도
17세기 회화의 관습들을 변형시킴으로써 여성의 이미지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 화가로 평가된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 아버지 젠틸레스키와 친구였던
카라바조의 화풍과 닮았다. 거추장스런 세부와 배경 따위는 생략하고
줄거리의 핵심에 앵글을 밀착시키는 근접 시점,
빛과 어둠의 가파른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력,
성서의 사건을 푸주간 고기토막처럼 능숙하게 다루는 붓 솜씨가 그렇다.
[그림]FURINI, Francesco(伊,1603-1646)◈Judith and Holofernes(1636)

성추행당한 화가의 세상 향한 분노
그녀는 카라바조의 추종자인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딸로서
극적인 사실주의의 제 2세대였다.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는 탓시라는 화가를 고용해 딸을 가르친다.
그러나 탓시는 그림 가르치는 일은 등한히 하고
19살의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해 버렸다.
이후 7개월여에 걸친 소송의 시간 속에서 여성이 기왕의 제도 아래서
자신의 인권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뼛 속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고난을 딛고 일어선 그녀는 피렌체와 로마, 나폴리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작가가 되었고 그림 속에서 한 사람의 위대한 영웅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림]Mantegna, Andrea(伊,1431-1506)◈Judith and Holofernes(1495)

“피고 타시는 성추행 혐의가 인정되므로 유죄. 금고 팔월 형에 처한다.”
이 판결을 듣는 순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만감이 교차 하였으리라.
아홉 달에 걸친 소송과 재판의 과정은 피해자인 그녀에게는 말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긴 공방의 시간동안
가해자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그녀를 음란한 여자로 매도하였으며
그녀는 법정에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할 것을 요구 받았고, 고문까지 받아야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녀를 비난하는 가운데,
결국 상처투성인 채로 승소하게 되었으니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림]TINTORETTO(伊,1518-1594)◈Judith and Holofernes (1594)

애당초 멀쩡한 유부남에다 딸까지 달린 타시에게 몸을 준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막상 고소를 당하자 타시는 여자가 먼저 꼬리쳤노라고 발뺌하고 나섰다.
애매한 처녀를 꽃뱀으로 모는 로마 제비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게다가 하늘같이 믿었던 옆집 투치아 아줌마까지
타시 편에서 아르테미시아를 궁지로 몰았다.
[그림]Sandro Botticelli(伊,1445-1510)◈Judith Leaving the Tent of Holofernes (1495-1500)

이쯤 되자 누가 피의자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조사 과정에서도 모진 문초를 당해야 했다.
없는 자백을 강요하며 꽁꽁 묶어놓고 을러대는 건 예사였고,
증언대에 오를 때도 손가락 마디에 차꼬를 채웠다.
거짓 증언을 예방한다는 구실이었다.
아르테미시아는 가락지 고문 도구를 타시에게
쳐들어 보이며 이렇게 쏘아붙였다고 한다.
“이게 당신이 약속했던 결혼 반지냐?”
[그림]LISS, Johann(獨,1597-1631)◈Judith and Holophernes(1628)

결국 추행 당시 남자가 칼을 들이댔다는 목격자
스티아테시의 증언이 인정되면서 꽃뱀 혐의는 벗었다.
17세기 이탈리아라면 여성 화가가 드물기도 했을 뿐더러,
화가라는 직종이 사회적 약자에 속했던 때였다.
스물둘 먹은 처녀가 낯붉힐 일로 세간의 이목을 끄는 것만 쳐도 몹쓸 일인데,
부도덕하고 뒤가 헤픈 여자로 입 소문이 나는 날엔 집안 망신에다
덤으로 노처녀 신세도 면치 못할 판이었다.
17세기 유럽,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가득했던 그 시대에
자신이 감수해야할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사회의 금기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그녀에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여성상,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림]Artemisia Gentileschi(伊,1593-1652)◈Judith Beheading Holofernes(1611-2)

“여자 혼자서 이런 그림을 그리다니 무서운 여자다.”
이탈리아의 미술 평론가 로베르토 롱기는 1916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르테미시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림은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성폭력 사건 이후 처음 발표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다른 화가가 그린 유디트와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조금 다르다.
많은 남성 화가들은 유디트를 유혹과 욕망, 죽음을 잇는
관능적인 성의 대상으로 그린 반면 아르테미시아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배제한 강한 여성의 모습으로 유디트를 표현했다.
최영미는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면서
“근육질의 에너지 넘치는 여전사는 예전의 서양 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여성상이며 남성의 욕망을 거세한 새로운 타입의 여성상이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에서도 남성을 능가한다.”다고 평가 했다.
결국 아르테미시아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받은 고통을 유디트라는
상징을 빌려 여성이 남성을 적극적으로 응징하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서
그녀를 포함한 동시대 모든 여성의 잠재된 분노를 당당하게 표출하였다.
[그림]Artemisia Gentileschi◈Judith and Her Maidservant(1612-3)

자기 얼굴 판박이로 그려
이 그림 속의 다소 거친 인상의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 뒤 베툴리아로 돌아올 준비를 하면서
긴장된 모습으로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
이 그림의 매력은 그 리얼함과 유딧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다.
발표 당시 유딧의 얼굴은 그녀를 닮고 홀로페르네스는
아고스티노 타시와 흡사하다는 의견이 많아
그녀의 잠재된 욕망과 분노를 표현했다는 평가가 많았다고 한다.
화가들이 제 얼굴을 성서 그림이나 역사화에 그려 넣는 건
르네상스 이후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 고전기 조각가 피디아스가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신상 방패 부조에다 대머리 자화상을
새겨 넣은 게 처음이었으니까 유래도 꽤 깊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이 나와서 이처럼 잔인한 역할을 맡은 건 본 적이 없었다.
바로크 미술을 빛낸 여성을 대라면 바쎄바, 수산나,
루크레티아, 클레오파트라, 유딧까지 쳐서 다섯이다.
[그림]Giuseppe Cesari(伊,1568-1640)◈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1605-10)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예나 지금이나 새삼스러울 것 없이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다.
북구 화가 브뤼겔도 유명한 속담그림에서
`악마도 아줌마는 못 당해!'를 한 귀퉁이에 그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미녀들은 유딧을 빼곤 목욕을 하다가 추행을 당하거나
제풀에 자살을 하는 둥 뒤끝이 싱겁다.
얼굴값에 걸맞는 활약상은 유딧이 유일했다.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가 이스라엘과 앗시리아의 대결을 신교의 저항에 내몰린
바티칸의 수세와 비교하면서 유딧의 겸손한 신앙이 루터의 교만을 물리친다고
해석하는 바람에 신학적 배경이 더해졌다.
[그림]Cristofano Allori(伊,1577-1621)◈ Judith with the Head of Holofernes(1613)

이런 식의 종교화는 대개 교회에서 주문하기 마련이었다.
16세기 중반 반종교개혁의 이데올로기는 피를 뿌리는 잔혹 주제를 반겼다.
이냐치오 로욜라가 이끄는 예수회에서는 예수가 피를 본
첫 사건 <할례>와 마지막 사건 <십자가 책형>를 교회 주제단화로 내걸면서
희생의 기쁨과 순교의 즐거움을 선전했고,
신학자들은 공공미술 주제로 성자나 성녀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장려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 미술의
세 가지 전제를 교훈, 설득, 기쁨이라고 보았다.
곧, 미술을 통해서 성서의 교훈을 가르치고,
설득력 있는 표현 형식으로 의심에 찬 영혼을 경건으로 인도하며,
이교도들에게조차 개종과 감화의 참 기쁨을
누리게 해야 올바른 미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바로크 미술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에 칼을 대고,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치고, 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잘린 머리를
쳐들고 있는 그림들이 쏟아져 나온 건 당연했다.
그림은 알로리 크리스토파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부인과 어머니를 유디스와 하녀의 모델,
그리고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그림]Artemisia Gentileschi(伊,1593-1652)◈Judith Slaying Holofernes(1612-21)

가장 끔찍한 장면 골라
아르테미시아는 술 취한 적장이 깨어나는 순간을 재현했다.
목을 스치는 섬뜩한 느낌이 잠을 깨웠을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피보라가 뿜어 나와 침소를 적신다.
지금까지 유딧이 등장하는 다른 그림들에서는
대개 적장의 머리를 자루에 챙겨 넣거나,
동트기 전 막사를 빠져 나와 귀환하는 장면이 많았다.
줄거리의 전후를 음미하면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는 파국의 결정적 순간을 골랐다.
유딧은 손놀림이 단호하다. 제물의 멱을 자르는 사제처럼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다.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적장의 몸통 위에 하녀 아브라가 타고 올라 누르는 장면도 성서에는 없다.
성서에는 유딧은 큰칼을 `두 차례 내리쳐서' 적장의 머리를
끊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발마의 운명을 내려보는 여성은
성서에 나오는 나약한 과부의 겁먹은 모습과 다르다.
저주받은 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칼자루를 당겨서
멱을 썰어내는 건 아무래도 지나쳤다. 화가는 성서 그림에다
제 얼굴을 넣은 것 가지곤 성이 차지 않았던 걸까?
아르테미시아는 이 주제로 여섯 점의 그림을 남겼지만,
살인의 장면과 그 뒤의 동작들을 각기 다른 자세와 각도로 표현했다.
이 유딧 연작들은, 그녀가 후원자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같은 손을 두 번 그린 적이 없다'고 천명한
그 당당한 작가 정신이 그대로 반영된,
페미니즘미술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자신의 모습을 유딧의 얼굴로 동일시한 아르테미시아의 유딧은,
복수와 응징의 추상같은 기운을 발하면서
직접 목을 베고 있는 끔찍한 장면을 표현한다.
결국 아르테미시아의 유딧은 모든 여성의 잠재된 분노
그 상징으로 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당당한 '주체'의 몸짓이야말로 '회화의 알레고리'임을 선언함으로써,
아르테미시아는 비로소 자신을 소유하려던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강간한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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